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이어서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코로나라는 병이 온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면서
코로나와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물론 코로나가 있기 이전에
종교는 이 세상에 이미 있었지만,
코로나라는 상황 때문에
종교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숨김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일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신앙인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자신도 위험에 빠뜨리고
많은 사람들도 그 위험 속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요즘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생각,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 속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미사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자수가 몇 명인지,
미사에 몇 명 나오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TV 미사를 보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보았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의 삶에서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중심이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아니었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이어서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코로나라는 병이 온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면서
코로나와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물론 코로나가 있기 이전에
종교는 이 세상에 이미 있었지만,
코로나라는 상황 때문에
종교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숨김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일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신앙인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자신도 위험에 빠뜨리고
많은 사람들도 그 위험 속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요즘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생각,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 속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미사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자수가 몇 명인지,
미사에 몇 명 나오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TV 미사를 보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보았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의 삶에서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중심이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아니었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