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공포와 태풍과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 피는 꽃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염병인 코로나의 공포 속에서
경제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태풍과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행한 것을 따르는 데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끔임없이 말씀으로 돌아와 확신과 위로를 얻어야 한다.
희생양을 만드는 관계에서
희생양이 되셨던 분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져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분별력과 겸손한 태도를 지니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대사제 가야파처럼 (요한 18,14) 죄를 지고 사는 것보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관계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움으로 우리 자신은 우월한 존재가 되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마음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며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일깨워주신다.
하느님을 위해서 내가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견디시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로 이끄신다.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자기 믿음에 도취 된 채 지내도록 허용하신다.
그러다가 그 자리를 떠나도록 강력한 자극을 주신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확신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없애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강력한 자극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둥지를 절대로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믿는 이들조차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답을 주지 않고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근본주의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그들은 무엇보다 변화를 싫어한다.
믿음이 주는 열매는 변화다. 변화가 없는 사람은 성장을 멈춘 사람이다.
주님의 영께서는 그날 그날 변화의 삶으로 나를 이끄시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극은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고통은 우리를 타성에서 벗어나게 하며
덜 중요한 것과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을 분별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제거해달라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한계를 겪고 있는 나를 측은한 마음과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신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틀을 부숴야 할 때 우리는 고통스럽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다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때 다른 존재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눈이 열려 지혜와 은총의 선물 보따리를 들고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시는 분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코로나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태풍과 홍수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이들을 방관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도 너희와 함께 고난받고 있다.”
그분께서 고통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신다면 우리의 고통은 의미가 있다.
살이 찟기는 아픔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고통스럽게 만날 때
그분을 알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고통 너머에 있는 생명, 또다른 자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이라고 말하는 그 생명의 에너지가 기쁨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겸손하다.
자신의 힘이라고 믿었던 힘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지혜를 힘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통제하는 힘이 아닌 허용하시는 힘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허용하시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코로나가 주는 경제적 고통과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신다.
태풍과 홍수가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복구를 위해 애쓰고 땀 흘리는 이들과 함께하신다.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행하셨다.
예수를 믿는 이들도 그렇게 행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