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주님은 마음이 산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도 마음이 산란하신가요?
주님의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왜 그렇게 산란하십니까?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일 겁니다.
여러 가지 마음이 오고간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뜻일까요?
그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것은 우선 유다의 배반일 것입니다.
다가온 죽음도 마음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겠지만
그저 유다 지도자에 의해 돌아가시게 되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산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감과 그간의 들인 공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허무감으로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는 하느님 말씀에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고 한탄하는
오늘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저도 요즘 가끔 아주 작지만 이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저의 사랑이 배반을 당했다는 느낌,
허사가 되어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전에 같았으면 이것이 미움으로 바뀔 텐데
한 번 사랑의 의지를 추스르면 오히려 사랑으로 점프를 합니다.
일은 실패가 있어도 사랑은 실패가 없고
일은 虛事로 끝나도 사랑은 虛事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허사로 끝난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일은 목표가 있고 결과가 있어서 실패도 있고 허사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랑인 한, 그것도 참 사랑인 한,
나를 위한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를 위해 무엇을 원하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끝이 없이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에 실패도 없고 허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제가 너무 제 식대로 재단하는지 몰라도
예수님의 마음도 순간 허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내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도 드시나 봅니다.
아니 마음을 다 잡으시는 것 같습니다.
유다가 적신 빵을 먹고 밖으로 나간 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배반을 당했는데도 끝까지 사랑하면,
다시 말해서 사랑을 그치지 않으면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마치 독수리 날개 위에 올라타듯
하느님의 사랑에로 올라 타 부활과 새 창조를 이룰 것입니다.
허사 체험은 정화와 조명을 거쳐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에 도달하고
이 하느님 사랑은 허사가 된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도 마음이 산란하신가요?
주님의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왜 그렇게 산란하십니까?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일 겁니다.
여러 가지 마음이 오고간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뜻일까요?
그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것은 우선 유다의 배반일 것입니다.
다가온 죽음도 마음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겠지만
그저 유다 지도자에 의해 돌아가시게 되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산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감과 그간의 들인 공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허무감으로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는 하느님 말씀에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고 한탄하는
오늘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저도 요즘 가끔 아주 작지만 이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저의 사랑이 배반을 당했다는 느낌,
허사가 되어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전에 같았으면 이것이 미움으로 바뀔 텐데
한 번 사랑의 의지를 추스르면 오히려 사랑으로 점프를 합니다.
일은 실패가 있어도 사랑은 실패가 없고
일은 虛事로 끝나도 사랑은 虛事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허사로 끝난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일은 목표가 있고 결과가 있어서 실패도 있고 허사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랑인 한, 그것도 참 사랑인 한,
나를 위한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를 위해 무엇을 원하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끝이 없이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에 실패도 없고 허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제가 너무 제 식대로 재단하는지 몰라도
예수님의 마음도 순간 허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내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도 드시나 봅니다.
아니 마음을 다 잡으시는 것 같습니다.
유다가 적신 빵을 먹고 밖으로 나간 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배반을 당했는데도 끝까지 사랑하면,
다시 말해서 사랑을 그치지 않으면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마치 독수리 날개 위에 올라타듯
하느님의 사랑에로 올라 타 부활과 새 창조를 이룰 것입니다.
허사 체험은 정화와 조명을 거쳐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에 도달하고
이 하느님 사랑은 허사가 된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룰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생명 만이 있을 뿐 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진정한 휴식,여가 라 하십니다.
신앙의 목적이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고,
물론 사랑에는 믿음이 전제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나 믿을 수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거기를 넘어서는 불신에서 믿음을
끌어내는 거기까지 가야한다는 어려움이 있는 거고
모든 인간 갈등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지요.
제가 좀 심리적으로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있어서 인지,
사람에게 집착하는 좋지 않는 버릇이 있었던 차에
어디선가 읽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는
글이 순간 마음에 확 꽂혀 삶의 철학으로 삼아야겠다!
굳게 다짐했던 때가 기억나네요.
가슴 찢어지는 사랑의 경험이 없었던 때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말이 되냐고,
거품을 물던 때도 있었지요.
이젠,사랑하다 헤어지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다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닐 때,
비록 물리적으로 헤어졌어도 상대를 위한 마음의 끈, 영혼의 끈을 놓지 못하는,
아니, 결코 놓을 수 없는,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진실과 사랑만이 남는 다는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까지는 숫한 눈물이 흘려 내린 뒤였습니다.
그래요.
“허사 체험은 정화와 조명을 거쳐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에 도달하고
이 하느님 사랑은 허사가 된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룰 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