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은 텅 빈 충만, 비워야 채울 수 있음!
십자가는 생명, 죽어야 열매 맺을 수 있음!”
한 형제로부터 성 금요일에 받은 문자입니다.
빈 무덤.
텅 빈 충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성삼일의 저에게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무덤, 이것이 지금 나이다.”
“주님께서 ‘나’라는 무덤 안에서 지금 죽어 계시거나 아니 계시다.”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마치고 성체를 무덤 감실에 모신 다음,
늘 기도하던 경당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성체가 아니 계신 경당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 군에 있을 때 제가 있던 부대에는 성당이 없어서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곤 하였는데
늘 성체가 모셔져 있던 성당에 익숙하던 저이었기 때문인지
기껏 예배를 보고나서도 한 구석 허전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예수 부활하셨도다!”라는 말이 거슬렸습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예수가 2천 년 전에 부활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가 저 이스라엘에서 부활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가 아무리 부활하였어도
그분이 내 안에 아니 계시고
그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그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식을 바다에게 빼앗기고 마음이 휑뎅그러한 어머니에게
봄이 오고 꽃이 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실종된 어머니에게 자식의 부활이 중요하고
다른 자식의 부활이 아니라 내 자식의 부활이 중요하듯
나의 주님이 내 안에서 부활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주님께서 그렇게 낯선 사람이 되셨습니까?
어찌하여 나와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예수가 되어버렸습니까?
주님께서 낯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은 저 부산에 계시다고 느끼고
내가 주님을 저 이스라엘로 쫓아버린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내 안에서 내쫓은 것입니다.
아니 계셔도 괜찮은 분으로 생각함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귀찮은 존재처럼 여김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는 주님을 내쫓은 것입니다.
나의 일에 몰두함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함으로써
주님을 쓸모없게 만들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주님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분은 무덤에 아니 계시니
주님이 살아 계신 곳으로 찾아가야겠습니다.
어디가 주님이 살아 계신 곳입니까?
아니 계신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다 계시지요.
그러니 모셔 들여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무덤에서 성전으로 바꾸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전 정화입니다.
다른 것들을 들이고 주님을 내쫓았던 저의 성전을
이제는 다른 것을 내쫓고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치자면
주님이 아니 계신 빈 무덤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기 위해 다른 것들을 비운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생명, 죽어야 열매 맺을 수 있음!”
한 형제로부터 성 금요일에 받은 문자입니다.
빈 무덤.
텅 빈 충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성삼일의 저에게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무덤, 이것이 지금 나이다.”
“주님께서 ‘나’라는 무덤 안에서 지금 죽어 계시거나 아니 계시다.”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마치고 성체를 무덤 감실에 모신 다음,
늘 기도하던 경당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성체가 아니 계신 경당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 군에 있을 때 제가 있던 부대에는 성당이 없어서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곤 하였는데
늘 성체가 모셔져 있던 성당에 익숙하던 저이었기 때문인지
기껏 예배를 보고나서도 한 구석 허전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예수 부활하셨도다!”라는 말이 거슬렸습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예수가 2천 년 전에 부활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가 저 이스라엘에서 부활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가 아무리 부활하였어도
그분이 내 안에 아니 계시고
그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그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식을 바다에게 빼앗기고 마음이 휑뎅그러한 어머니에게
봄이 오고 꽃이 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실종된 어머니에게 자식의 부활이 중요하고
다른 자식의 부활이 아니라 내 자식의 부활이 중요하듯
나의 주님이 내 안에서 부활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주님께서 그렇게 낯선 사람이 되셨습니까?
어찌하여 나와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예수가 되어버렸습니까?
주님께서 낯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은 저 부산에 계시다고 느끼고
내가 주님을 저 이스라엘로 쫓아버린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내 안에서 내쫓은 것입니다.
아니 계셔도 괜찮은 분으로 생각함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귀찮은 존재처럼 여김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는 주님을 내쫓은 것입니다.
나의 일에 몰두함으로써 내쫓은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함으로써
주님을 쓸모없게 만들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주님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분은 무덤에 아니 계시니
주님이 살아 계신 곳으로 찾아가야겠습니다.
어디가 주님이 살아 계신 곳입니까?
아니 계신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다 계시지요.
그러니 모셔 들여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무덤에서 성전으로 바꾸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전 정화입니다.
다른 것들을 들이고 주님을 내쫓았던 저의 성전을
이제는 다른 것을 내쫓고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치자면
주님이 아니 계신 빈 무덤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기 위해 다른 것들을 비운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작은 사랑을 삶으로 살아가서
우리 주님의 부활 기쁨을 함께 하고 나누겠습니다.
부활 聖夜 미사에
당쇠 신부님의 지휘와 함께 거룩하게 주님께
영광 드리는 성가는 주님의 부활을 실감케 해 주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저를 통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느끼신다는
님의 격려의 글은 이 부활의 날에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
사랑이다 싶어, 뛸 듯이 기쁘면서도,
한 편으론 묵상이 부담스러워 언제 그만 둘지
제 자신도 모르는 저에게 격려의 글은 부담이 되는
이 인간의 양면성은 이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건가요?
기쁜 나날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성삼일을 분주하게 지내면서
늘, 갖는 느낌이지만, 예수님만 부활하시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기도 하지요.
어떤 분으로부터 받은 부활 메시지에
“겨울이 가고 봄이 왔듯이 죽음이 가고 생명이 왔어요.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혹독한 겨울,
그 겨울도 지나가고 믿기지 않던 봄이 정말 찾아왔네요.
더 이상 무엇을 믿지 못해 비움을 망설일까요.
진심으로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