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체험을 한 베드로의 이 말은 언제나 저에게 힘을 줍니다.
인간은 죽게 해도 하느님은 살리신다는 말씀.
이것은 베드로가 아주 절절히 체험하고 한 말입니다.
그가 체험한 한 편은 인간에 대해서이고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파괴의 힘은 미움에서 나오고 미움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미움은 관계적인 힘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둘 다 인격적인 관계 에너지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라면
미움은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에너지의 양으로만 치면
무엇을 파괴할 정도라면 미움도 굉장한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파괴의 에너지도 커집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자기중심적으로 쓰는 것이 문젭니다.
간단하게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도예공이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 해 도자기를 빚고 구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나왔습니다.
이때 그는 그 도자기를 사정없이 깹니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충 만들었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파괴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대와 정성이 컸기에 파괴의 에너지도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파괴 에너지도 문제지만
집단의 파괴 에너지가 더 큰 문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죽음의 문화를 형성합니다.
문화의 요소는 집단성과 향유입니다.
그러니까 문화란 집단적으로 즐기는 것이고
죽음의 문화란 집단적으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이지요.
다른 동물도 집단적으로 다른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지만
모두 다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인간만이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
즉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없으니 파괴를 하고
그 파괴와 가학의 즐거움을 집단적으로 즐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죽이는 것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죽이실 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힘이고 그 힘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체험한 다른 한 편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에 대해서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살리는 것에 참여하는 것은
이 사랑에 참여할 때뿐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존재도 살릴 수도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체험을 한 베드로의 이 말은 언제나 저에게 힘을 줍니다.
인간은 죽게 해도 하느님은 살리신다는 말씀.
이것은 베드로가 아주 절절히 체험하고 한 말입니다.
그가 체험한 한 편은 인간에 대해서이고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파괴의 힘은 미움에서 나오고 미움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미움은 관계적인 힘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둘 다 인격적인 관계 에너지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라면
미움은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에너지의 양으로만 치면
무엇을 파괴할 정도라면 미움도 굉장한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파괴의 에너지도 커집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자기중심적으로 쓰는 것이 문젭니다.
간단하게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도예공이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 해 도자기를 빚고 구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나왔습니다.
이때 그는 그 도자기를 사정없이 깹니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충 만들었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파괴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대와 정성이 컸기에 파괴의 에너지도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파괴 에너지도 문제지만
집단의 파괴 에너지가 더 큰 문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죽음의 문화를 형성합니다.
문화의 요소는 집단성과 향유입니다.
그러니까 문화란 집단적으로 즐기는 것이고
죽음의 문화란 집단적으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이지요.
다른 동물도 집단적으로 다른 존재를 파괴하고 죽이지만
모두 다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인간만이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
즉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없으니 파괴를 하고
그 파괴와 가학의 즐거움을 집단적으로 즐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죽이는 것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죽이실 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힘이고 그 힘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체험한 다른 한 편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에 대해서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살리는 것에 참여하는 것은
이 사랑에 참여할 때뿐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존재도 살릴 수도 있게 됩니다.
날마다 깨달음을 주시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도 삶이 때때로 버거울 때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인
"내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을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데,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더욱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에게 죽고 사는 문제 외에는 못 넘어 갈 것이 있을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
천안함으로 생명을 잃은 우리 대한의 남아들,
그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아픔들,
그래요,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으로
희망을 갖고 어두운 터널을 사랑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부활신앙이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겨보는 아침입니다.
“인간이 살리는 것에 참여하는 것은 이 사랑에 참여할 때뿐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다른 존재도 살릴 수도 있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나에게도 베풀고, 너에게도 베풀어
충만한 생명의 에너지로 남은 여정 걸어 갑니다.
노오랗게 활짝 핀 개나리, 연분홍의 진달래와 함께
우리 주님 부활의 기쁨을 신나게 노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