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메디치 가문의 무덤 (1526- 33)
작가 : 미켈란젤로 부르나요티
재료 : 대리석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성 로렌죠 성당 제의실
근래 우리나라 재벌 총수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재벌의 위상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재벌은 단순히 돈을 얼마나 많이 긁어 모으는데 존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회로 환원했느냐가 더 관심이다. 우리 나라에도 경주 최부자나 근래 대구 출신이고 가톨릭 신자였던 서병조(아우구스티노)의 미담은 부자들이 사회에 남긴 향기로운 신화로 남아있다.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 수준 중 중요한 것은 재벌들의 처신이 얼마나 국민들의 생활 향상에 도움을 주었느냐와 관계되는데 이런 관점에서 중세 이태리 피렌체에서 300여년을 활동했던 메디치 가문은 세계 재벌의 차원에서도 멋진 삶을 살았던 자랑스러운 재벌에 속한다.
메디치 집안은 모직사업으로 돈을 모아 금융업으로 전환해서 재산이 증식되면서 당시 교황청 재산까지 관리하다 보니 재산이 엄청 늘어 피렌체라는 도시의 부자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재벌이 되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의 자랑스러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 작품에도 등장하는 로렌죠 메디치에 의해 이 재벌 가문의 성격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먼저 대단한 인문주의자로서 당시 이태리를 석권하던 르네상스 운동의 건강한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문화 학문 예술 분야에 과감히 투자해서 유럽 문화 향상에 일조를 하게 만들었다. 그는 하느님 중심의 편협하고 사변적 사고방식에 갇혀있던 교회를 세상의 차원으로 확산시켜 교회를 먼저 쇄신시키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것은 그가 지닌 돈주머니를 쉽게 풀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문주의자로서 대단한 식견과 혜안이 있었기에 당시 유럽 전체를 지배하던 교회의 편협한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당시 교회는 오늘도 그럴 수 있듯이 제도나 조직의 유지나 확장을 목표로 하면서 시대사조에 뒤지는 삶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했기에 인간 가치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진보에 대해 대단히 유치한 수준이었으나 그는 이미 당시 동로마 제국이 망하자 피난 온 학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대우하는 과정에서 희랍 플라톤 철학의 매력적이며 인간적인 관점에 눈뜬 인문주의가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식스티나 경당의 “천지 창조”를 제작하면서 화가로서의 명성도 확고히 했다.그는 원래 조각가였으나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이 천정화를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위상도 키우게 되었다.
작가는 천재적 자질과 지칠줄 모르는 용기로 다른 예술가들이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그에겐 또 다른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 그는 교황이 있는 로마 뿐 아니라 경제와 예술의 중심지이며 자기 고향인 피렌체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인정받고픈 유혹에 빠져 있었다.
이런 그에게 절호의 행운이 찾아 왔다. 그와 함께 로렌죠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로렌죠의 아들 죠반니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면서 그에게 메디치 가문의 조상들을 모실 무덤을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죠의 아들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아름다운 기억이 있었다.
단순한 재벌 총수가 아니라 대단한 예술적 감각이 있었던 로렌죠는 15세의 어린 소년 미켈란젤로가 조그만 돌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의 대단한 재능을 알아본 그를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양아들처럼 키우면서 예술가로서의 그의 길을 열어 주었던 은인이었다.
이런 처지에 교황의 부탁은 단순히 자기 기량을 피렌체 사회에 알릴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자기의 인생길을 열어준 은인에 대한 보은의 차원에서도 감회가 있는 것이었다.
이 제의실에는 교황 레오 10세의 삼촌인 줄리아노와 그의 조카인 로렌죠의 것으로 레오 10세의 교황군을 지휘하면서 피렌체 전체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삼촌과 조카의 무덤이 있다.
그의 아버지 로렌죠 마니피코는 메디치 가문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고귀한 가문으로 기억되도록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인생은 너무 파란만장했다
당시 피렌체에서 경제력으로 대결 구도에 있던 파치 가문이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4세가 추기경 방문 기념으로 피렌체 대성당에서 묵계로 계획하여 봉헌하고자 했던 부활절 미사에 성직자들도 연루된 자객들을 보내 로렌죠 형제들 살해하고자 했으나 만일의 위험을 대비했던 로렌죠는 용케 목숨을 건졌으나 갑옷을 입지 않고 도착한 동생 쥴리아노는 잔인하게 살해되는 슬픔을 겪었다.
그는 재치와 기치로 이 암살단을 체포해서 그들 악행에 상응한 응분의 복수를 했으나 교황의 미움을 사서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아픔을 겪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폴리로 가서 포악하고 기괴한 행적으로 유명했던 나폴리 공화국의 왕인 페르디난도 1세를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에 힘입어 자녀인 줄리아노와 조카 로렌조는 피렌체 공국의 귀족으로 대단한 지위를 누리다 죽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자기 동생과 조카의 무덤을 만들었고 이는 함께 삶을 살았던 미켈란젤로에게도 좋은 추억과 보은의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쥴리아노의 무덤엔 낮과 밤이라는 두 남녀의 조각이 누워 있는데 우선 중앙에는 오늘도 뎃상을 공부하는 미술학도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쥴리아노의 좌상이 있다.
군인의 복장이나 그 용모는 더 없이 수려하다. 사실 그의 실재 용모는 참으로 보잘 것 없었으나 미켈란젤로는 의도적으로 그의 얼굴을 고귀한 모습으로 그려 메디치 가문의 영화를 기렸다.
당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전혀 줄리아노와 닮지 않았다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백 년후 누가 그의 실재 용모를 기억하겠느냐고 응수하면 이 모습을 그렸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무덤 도굴 방지를 피하기 위한 처신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대단한 식견이 있던 메디치 가문과 미켈란젤로는 오늘도 크리스챤들이 죽음과 연루되어 사용하던 천당 지옥 심판과 같은 전통적 교리에서 벗어난 인문학자 다운 안목으로 죽음의 실상을 은유적(Alegorical)으로 표현했다.
밤과 낮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의 일생은 출생이라는 낮에 태어나 죽음이라는 밤을 향한 긴 여정이며 죽음은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것이란 크리스챤의 죽음관을 암시하고 있다.
로렌조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칭송되는 그는 군인의 복장을 하고 죽음을 사색하듯 아래의 관을 바라보고 있다. 로렌죠 막니피코의 증손자인 로렌죠는 황혼과 새벽이라는 주제로 남녀의 조각이 관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두 사람은 여느 인간이 다 그렇듯 인생의 황혼을 지나 새벽을 향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여정을 우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혼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고 있는 반면 , 새벽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생명감이 넘치고 있다. 남녀를 대비시키면서 의도적으로 남녀의 일치와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배치했다.
줄리아노의 좌상 아래 석관이 있으며 그 위에 두 남녀가 비스듬히 누워 삼각 구도를 만들고 있다. 삼각형은 견고성의 가장 기본인 것처럼 줄리아노와 두 남녀가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했다.
밤의 아랫 부분엔 양귀비와 올빼미의 조각이 있어 밤을 상징하고 있으며 ,어깨와 엉덩이 부분은 야위었고 작고 늘어진 젖가슴은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인의 모습이어서 세상에 생명을 선사하고 자기 역할을 다했기에 이제 떠날 날을 기다리는 인생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삶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여정에서도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인생의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을 기약하는 순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낮의 얼굴은 가장 늠늠한 남자의 모습으로 인간 삶의 활력과 정열을 묘사하고 있다.
어깨 너머로 들어오는 해를 맞아들이는 그의 얼굴은 미완성의 모습으로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인생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을 절정에 올린 로렌죠 메디치 가족들의 이야기가 레오 10세 교황과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미켈란젤로의 천재적인 감성으로 완벽히 표현되었다.
메디치 집안 출신이 교황 레오 10세와 이 집에 양아들로 발탁되어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마련한 미켈란젤로가 만든 이 무덤 조각은 그 시대를 봐서도 예언적인 과감한 표현이었으며 오늘 크리스챤들에게도 신앙의 심화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누구나 예외없이 겪어야 하는 죽음에 대한 해답으로 그리스도교는 죽음 부활 지옥 천국과 같은 전통적인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 식상해 있다.
중세 고틱 대성당 입구엔 어김없이 조각된 최후 심판의 도상 중앙에 심판주이신 주님이 좌정해 있고 오른쪽에 천국 입장을 기다리는 성인들 왼쪽에 지옥에 떨어질 죄인들이 떨고 서있는 도상으로는 현대인들에게 감동이나 경각심을 줄 수가 없다
반면 인문학에 대힌 깊은 이해속에서 성장한 작가가 만든 파격적인 이 작품은 단순한 무덤이라는 인생의 마지막만이 아니라 이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즉 전통적 크리스챤 교리의 죄짖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엄포만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함으로서 삶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삶에의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를 키운 로렌죠 마니피고는 메디치가 남자들의 지병이었던 통풍으로 고생하다 40을 점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의 이 짧은 인생은 가문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로렌죠의 삶은 파치가문과 같은 경쟁 상대의 재벌로부터 오는 음모를 받아왔고 교황까지도 자기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인 모의 까지도 눈감아 주는 암담함을 감당해야 하는 삶이었다. 여기에 겹쳐 프랑스와 이웃 공국들이 피렌체를 침략하고자 하는 것을 화해 아니면 무력으로 막아야 하는 책임감을 지니며 살아야 했던 잠시도 편할 날이 없는 가시방석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그는 교양 있는 재벌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기쁨을 지녔고 좁은 안목으로 바라보면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는 시를 좋아했는데 그 시중에 어떤 것은 대단히 관능적인 것도 있었다. 한마디로 자기 인생은 현대적 시각으로 봐서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신앙이 그를 편협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여유와 자유를 허락하는 삶으로 살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인생을 즐겨라”라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신앙 안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임을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섭렵하고 이것을 통해 그는 신앙이 인간에게 고귀한 자유의 선물임을 짧은 삶으로 표현하며 살다가 하느님께로 갔다.
이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단순한 죄를 피하라는 뜻만이 아닌 멋진 삶을 살아야 하고 멋진 삶의 하느님께로 눈길을 돌렸을 때 발견할 수 있다는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즉, 신앙은 열쇠로서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는 많은 순간 족쇄로서 신앙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