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관련한 변화가 “열림”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얘기하고 있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수동태입니다.
스스로 눈과 마음을 연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열린 것입니다.
열린다는 것은 또한 제자들이 눈과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표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갔던 것처럼
제자들은 눈과 마음을 닫아걸고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눈과 마음이 닫혔고
또 어떻게 눈과 마음이 열렸을까요?
언젠가 어떤 분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3차 신경통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 신경통은 면도칼로 살을 에고 드릴로 뼈를 뚫는 듯한 통증이
안면에 지속되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랍니다.
그래서 이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아예 신경을 파괴했답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은 좋지만
문제는 다른 감각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나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와 비슷하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차단작용을 하게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 닥치면
어떤 사람은 氣絶이나 昏絶까지 합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에 눈을 닫아버리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에 관심을 꺼 버립니다.
그 결과는 痛覺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感覺도 잃게 되고
참혹한 상황에 대한 心慮만 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關心을 다 꺼버린 멍한 사람이 됩니다.
제자들도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단하기만 했던 주님께서
제자들이 보기에는 갑작스럽게 참변을 당하였으니
감당하기 힘들어 다들 그 현장에서는 도망쳐
어느 한 곳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나
눈과 마음이 닫힌 것은 다 같은 작용입니다.
유다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문을 닫은 것이나
마음을 너무도 괴롭히는 절망감, 죄책감, 허무감 등을 차단하기 위해
아예 마음을 꺼버리는 것은 같은 작용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눈을 주님께서 여시고 마음을 여십니다.
어떻게?
어제 엠마오의 제자 복음에서 주님은
속에서 제자들의 마음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랑,
다시 말해서 수난의 사랑(Passion)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Passion은 수난, 즉 고통을 받아들임이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엇을 하려는 열정입니다.
이런 주님의 Passion이 제자들에게 Compassion하게 하신 것입니다.
보통 동정이라고 번역하는 Compassion이란
Passion을 같이 나눈다는 뜻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아들의 수난의 사랑(Passion)을 Compassion하시듯
전에 Passion을 피해 달아난 제자들도 이제는 Compassion할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얘기하고 있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수동태입니다.
스스로 눈과 마음을 연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열린 것입니다.
열린다는 것은 또한 제자들이 눈과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표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갔던 것처럼
제자들은 눈과 마음을 닫아걸고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눈과 마음이 닫혔고
또 어떻게 눈과 마음이 열렸을까요?
언젠가 어떤 분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3차 신경통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 신경통은 면도칼로 살을 에고 드릴로 뼈를 뚫는 듯한 통증이
안면에 지속되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랍니다.
그래서 이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아예 신경을 파괴했답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은 좋지만
문제는 다른 감각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나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와 비슷하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차단작용을 하게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 닥치면
어떤 사람은 氣絶이나 昏絶까지 합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에 눈을 닫아버리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에 관심을 꺼 버립니다.
그 결과는 痛覺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感覺도 잃게 되고
참혹한 상황에 대한 心慮만 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關心을 다 꺼버린 멍한 사람이 됩니다.
제자들도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단하기만 했던 주님께서
제자들이 보기에는 갑작스럽게 참변을 당하였으니
감당하기 힘들어 다들 그 현장에서는 도망쳐
어느 한 곳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나
눈과 마음이 닫힌 것은 다 같은 작용입니다.
유다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문을 닫은 것이나
마음을 너무도 괴롭히는 절망감, 죄책감, 허무감 등을 차단하기 위해
아예 마음을 꺼버리는 것은 같은 작용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눈을 주님께서 여시고 마음을 여십니다.
어떻게?
어제 엠마오의 제자 복음에서 주님은
속에서 제자들의 마음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랑,
다시 말해서 수난의 사랑(Passion)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Passion은 수난, 즉 고통을 받아들임이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엇을 하려는 열정입니다.
이런 주님의 Passion이 제자들에게 Compassion하게 하신 것입니다.
보통 동정이라고 번역하는 Compassion이란
Passion을 같이 나눈다는 뜻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아들의 수난의 사랑(Passion)을 Compassion하시듯
전에 Passion을 피해 달아난 제자들도 이제는 Compassion할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연민(Compassion = 고통을 함께 함)
읽고 또 읽어도 오늘 강론 말씀이 제게는 좀 어렵네요.
눈을 닫고 관심을 꺼버리고 외면하며 돌아서곤 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서 뜨끔하기도 하구요..
한번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 앞에 잠시 머물러섭니다.
자신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스스로를 깨트리셨던 십자가 사건...
나누기위해 깨어지고자 가셨던 슬프지만 영광의 십자가 길을 묵상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처럼 깨어지기를 거부하고 살기에 비난받습니다.
빵 한덩이를 나누는 일에서부터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는 십자가길은 시작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위해 우리 몫의 작은 빵 한덩이를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예수님의 Passion을 Compassion하는 일의 시작이되리라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