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오간 말씀입니다.
얼마 전 고심 끝에 충고를 하였는데
벽에다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반발이 느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하다 분명 사랑으로 얘기를 하고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려면 오지도 마라는 식입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영이 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感受性.
느끼고 받아들이는 성질.
그러니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느끼려 해도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질입니다.
사랑의 불감증, 영적 통교의 단절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까?
사랑하다 상처를 입은 사람,
그래서 사랑에 몸 도사리는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 특히 남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자신 안에 부정이
늘 터주 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감각 세계에 머문 사람은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계획 등,
자기에게 사로 잡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해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교만으로 신비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의 자유가 없는 사람도 영적인 감수성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런 사랑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고,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오간 말씀입니다.
얼마 전 고심 끝에 충고를 하였는데
벽에다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반발이 느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하다 분명 사랑으로 얘기를 하고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려면 오지도 마라는 식입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영이 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感受性.
느끼고 받아들이는 성질.
그러니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느끼려 해도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질입니다.
사랑의 불감증, 영적 통교의 단절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까?
사랑하다 상처를 입은 사람,
그래서 사랑에 몸 도사리는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 특히 남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자신 안에 부정이
늘 터주 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감각 세계에 머문 사람은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계획 등,
자기에게 사로 잡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해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교만으로 신비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의 자유가 없는 사람도 영적인 감수성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런 사랑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고,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니
모든 것이 사랑으로 만 보일 것 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사랑안에서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육간에 건강 하셔서 앞으로 종종이라도 신부님의 묵상 나누어 주시길 빕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고 영은 영을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여겨야겠지요.
그래서 '내 탓이오!"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사랑이 내리사랑이듯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느끼려 해도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질“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네요.
내가 부모를 잘 만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면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할 소명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네요.
무딘 마음을 살같이 부드럽게 할 때 하느님의 영도
살아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당분간 묵상 글을 올릴 수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읽는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질까요?
그런 것 있잖아요.
열심히 공부하려고 강의실에 들어갔지만
교수님의 사정으로 오늘 휴강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기분 말입니다.
제가 이 수준이거든요.
잘 다녀오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