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선교 일로 이곳 러시아에 왔습니다.
2년 만에 오는 것인데 별로 바뀐 것이 없습니다.
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는데 심사대가 몇 군데 밖에 없어서
그 많은 사람이 한참을 기다리는 것도 전과 같았고
그 수속이 느려터진 것도 전과 같이 그대로였습니다.
“빨리 빨리”의 한국과 비교를 하니까 속이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한 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하며
마음을 추스르며 느림과 불편함을 받아들이자 곧 평화가 왔습니다.
많은 경우 평화란 평화로이 참는데 있고 견디는데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이?”하고 무엇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왜 이래?”하고 어떤 관계와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입니다.
저와 저를 안내해 준 인도 신부를 태운 뤽사 운전사가
교통경찰에 의해 사정없이 구타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있는데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것은 그렇게 맞은 그 운전사의 이후 태도였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상심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분노나 수치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러려니 받아들이니
그야말로 “No Problem!”이었습니다.
마치 돌을 던졌는데 돌이 떨어질 때 잠깐 파문이 일고는
이내 잠잠해지는 깊은 물과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물과 큰 물은 웬만한 돌이 떨어져도
파문이 오래 가지 않고 이내 잠잠해집니다.
평화도 이런 큰 마음에서 가능합니다.
작은 일에 일일이 시비를 걸지 않고 “그러냐?”
“괜찮아, 그럴 수 있지”하고 받아들이고 견디면 평화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얘기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다 받아들여 참고 견딜 때 평화롭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기에 앞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이 함께 계심만으로 평화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처럼 평화로운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병이 들어도,
불쾌한 일이 생겨도,
시비가 생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받아들이고 견디면
이내 마음의 산란스러움이 잔잔해지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엇이 풍덩하고 내 마음에 뛰어 들어 와도
“왔냐?”하고 이내 잔잔해지고 잠잠하게 되기를,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오 하느님의 뜻이여!”하고
기쁘고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2년 만에 오는 것인데 별로 바뀐 것이 없습니다.
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는데 심사대가 몇 군데 밖에 없어서
그 많은 사람이 한참을 기다리는 것도 전과 같았고
그 수속이 느려터진 것도 전과 같이 그대로였습니다.
“빨리 빨리”의 한국과 비교를 하니까 속이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한 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하며
마음을 추스르며 느림과 불편함을 받아들이자 곧 평화가 왔습니다.
많은 경우 평화란 평화로이 참는데 있고 견디는데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이?”하고 무엇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왜 이래?”하고 어떤 관계와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입니다.
저와 저를 안내해 준 인도 신부를 태운 뤽사 운전사가
교통경찰에 의해 사정없이 구타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있는데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것은 그렇게 맞은 그 운전사의 이후 태도였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상심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분노나 수치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러려니 받아들이니
그야말로 “No Problem!”이었습니다.
마치 돌을 던졌는데 돌이 떨어질 때 잠깐 파문이 일고는
이내 잠잠해지는 깊은 물과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물과 큰 물은 웬만한 돌이 떨어져도
파문이 오래 가지 않고 이내 잠잠해집니다.
평화도 이런 큰 마음에서 가능합니다.
작은 일에 일일이 시비를 걸지 않고 “그러냐?”
“괜찮아, 그럴 수 있지”하고 받아들이고 견디면 평화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얘기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다 받아들여 참고 견딜 때 평화롭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기에 앞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이 함께 계심만으로 평화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처럼 평화로운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병이 들어도,
불쾌한 일이 생겨도,
시비가 생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받아들이고 견디면
이내 마음의 산란스러움이 잔잔해지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엇이 풍덩하고 내 마음에 뛰어 들어 와도
“왔냐?”하고 이내 잔잔해지고 잠잠하게 되기를,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오 하느님의 뜻이여!”하고
기쁘고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침묵을 지킨 만큼 그리스도를 만나게되고 평화로움에 잠기게 됩니다.
모든 과일 열매가 뜨거운 태양 , 비, 바람을 견디어 내야
새콤 달콤하게 익어 맛있는 과일이 되듯이
나의 삶도 모든 상황, 문제들을 견디어 내 봅니다.
멀리에서 주신 말씀이라 더 더욱 소중하게 들려 옵니다.
감사드리며 하느님 안에서 선교 일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마음 바다에 낙엽 한 장 떨어진 것도 감당 못하는
마음의 파도를 처가며 사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 살아남기 위해 꺼내드는
마지막 카드, ‘인간에게 위안을 얻지 말라’
그렇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안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만이 품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적 한계를
‘너’도 품고 있는 연약한 인간의 동질성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단지 그 아픔을 수용할 뿐이라는 ‘너’의 깊은 속내를 알아 차렸을 때,
비로소 ‘나도 참고 견디어야지!“ 라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수용의 극치라고 일컫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