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씨 뿌리는 비유를 묵상하다가 문득 제가
저희 <관구 말씀 나누기>에 강론을 올린 게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하여
뒤져보니 2008년 2월 10일 사순 1 주일부터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만 4년 7개월 간 거의 매일 강론을 올렸으니
짧지 않은 기간 주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살아온 셈입니다.
아마 이 강론만 모아도 책 몇 권이 나올 것입니다.
저는 한 번 한 강론을 또 올리는 것을 싫어하여
(혼배나 장례 미사 강론은 같은 강론을 한 적이 거의 없고 매번 다름)
매일 강론을 올리는 것이 어떤 때 바닥 난 우물처럼 버겁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만 둘까 하는 유혹이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제가 과연 주님의 말씀의 좋은 마음 밭이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언젠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는 옛날 엄마들의 이유식이 생각났습니다.
저도 매일같이 말씀을 묵상하여 강론도 하고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치 어머니들의 이유식과 비슷하다는 거지요.
요즘처럼 이유식이 없던 때 젖을 뗀 아기에게 거친 음식을 줄 수 없어
엄마가 곱게 씹어 아기에게 그 걸 먹이곤 하였는데,
엄마는 씹기만 할 뿐 하나도 먹지 못하고 아이한테만 들어가는 거지요.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지요.
중국 계림 지방에는 가마우지를 가지고 고기를 잡는데
가마우지 목을 끈으로 묶어 고기를 잡아도 넘어가지 못하게 하여
사람이 그 고기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마치 이유식을 먹이는 어머니나 가마우지처럼
저도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만 내 마음의 양식은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양식만 되는 것이 아닐까 자주 반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만 듣는 말씀은
진정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지 못하고,
그럴 경우 저는 주님 말씀의 좋은 밭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런 반성을 하며 또 이렇게 감상에도 젖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그리고 진정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가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를 바라실 텐데.
나는 밭은 밭이로되 마치 묘목 밭 같구나!
씨를 틔워서는 다른 곳으로 묘목을 보내는 묘목 밭.
그래 그것도 좋겠다.
내가 정말 좋은 묘목 밭이 될 수만 있다면.
내 밭에 비록 아름답고 늠름한 나의 아름드리 큰 나무는 없을지라도
늘 새롭게 자라나는 묘목들이 그득하고
필요한 곳곳에 보내질 수 있다면 그것 멋진 사랑이리라!
그렇다.
수로의 물이 계속 흐르고 흘러 결국 어디 논으로 흘러들겠지만
흐르는 동안에는 수로에는 물이 늘 그득한 것처럼
전하기 위한 말씀일지라도 내 안에 넘실거렸지 않은가, 지난 5년간.
그러니 주님 말씀의 통로가 될 수 있었음은 얼마나 큰 은총이고,
주님의 말씀을 나를 통해 경청하는 분들은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반성도 하고
은총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