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이젠하임 제단화 (1515년)
작 가 : 그뤼네발트 (Mattias Gruneward : 1470-1528)
크 기 : 목판 유채 (232X75cm)
소재지 : 프랑스 콜마르 운트린겐 미술관
가톨릭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주님 생애에서 극적인 체험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 당연히 성화 중에 성화로서의 주제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것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성모님과 제자들이 애통하는 것이 대종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것은 신자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때 그 어려움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목적 차원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즉 예술성의 과시 보다 사목적 위로의 차원에서 성화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성화가 신앙의 심화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리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이 작품은 약 10년 전 소개한 유명한 십자가를 주제로 한 작품이나 이번엔 이 작품을 사목적 차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나 오늘이나 인간들이 당하는 큰 고통은 질병에 대한 것이고 특히 중세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 요즘의 코로나처럼 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주었기에 교회도 이런 신자들에게 신앙으로 병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여러 배려를 했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 되지 않았던 중세기 교회는 질병에 대한 것 역시 신자들을 오늘날 보다 훨씬 더 배려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런 면에서 당시 교회는 신앙으로 질병을 고통과 불안을 극복하는 좋은 배려를 했다.
그중에서도 이 성화와 연관된 사목활동은 성화가 신자들에게 줄 수 있는 신앙심 고취 차원과 어려움의 극복 차원에서 얼마나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알리는 좋은 자료가 된다.
중세기 북 유럽엔 맥각병이라는 전염병이 유행해서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다. 남쪽 따뜻한 곳에선 콜레라와 흑사병이 큰 재앙의 원인이었던 것과 같이 북유럽에서 부패한 밀에서 발생하는 균에 의해 전염되는 맥각병이 사망으로 이어지는 치명적 피해를 주었기에 큰 사회문제가 되곤 했다. 이 병에 걸리면 마비, 환각 현상 경련 등의 현상이 생기면서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 다리를 절단하기도 했다.
바로 이병과 관계되는 사목을 했던 어떤 수도자들의 감동적인 활동은 신자들의 생활에 큰 위안이 되었으며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에게 신앙이 줄 수 있는 위안을 주었던 좋은 예가 되었다. 후대의 어떤 이들은 교회가 이런 전염병이 있을 때 의학적으로 접근치 않고 종교적으로 접근함으로서 병세를 더 키웠단 비판을 하나 이것은 현대의 시각으로서 생각이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의학적 발달이 되지 않았던 시대에 허황한 의학 지식 보다 종교적 차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접근하는 것이 인간 전체로 볼 때 훨씬 이상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있던 지역은 맥각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이런 환자들을 돕기 위해 성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모신 수도회가 창설된다.
이 안토니오 성인은 중세기 프란치스칸으로 역시 민중들의 신심 생활에 큰 공헌을 했던 파도바의 안토니오가 아닌 유럽 수도 생활의 창설자로 여겨지는 4세기 이집트 출신의 안토니오 성인이시다.
이 성인은 초세기 수도자로 하느님께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서 기도에 몰두했는데이 과정에서 악마의 소행으로 볼수 있는 여러 유혹을 당했기에 맥각병 환자들이 겪어야 하는 환각 현상에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 성인을 주보로 모셨다.
이 수도회는 안토니오 성인과 함께 또 초세기 로마제국 황실의 근위대장으로 크리스챤이 되어 순교한 성 세바스챤 성인을 주보로 모셨다. 이 성인은 황제가 너무 총애해서 배교시키기 위해 기둥에 묶어두고 죽지 않고 극도의 고통을 겪게 만들어 배교토록 하기 위해 많은 화살로 온 몸에 상처를 주었으나 배교치 않고 순교했다는 영웅적 행적의 성인이셨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성인은 화살에 의해 많은 신체적 상처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기에 맥반병 환자들이 한센 병자처럼 몸이 흉하게 문드러지는 이 병자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이 성인을 주보로 삼았다.
오늘날 루루드나 메쥬고리에의 성모성지에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청하기 위해 모이는 것처럼 당시 열악한 의료 수준에선 병자들이 성지를 찾아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수도원 수도자들은 치료를 받노라 모든 재산과 세월을 다 탕진한 후 마지막 희망을 두고 이곳을 찾은 환자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극진히 대함으로서 극도의 불안과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을 안심시키면서 자신들이 이제 예수님의 집에 와서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수도자들의 역할은 예수님의 사랑을 환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심리적인 안정을 주게 만든다. 어차피 여기에 온 환자들은 회생 불능의 환자들이기에 기적적인 치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이 주는 위안으로 자기들의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
환자들은 수도자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서 입에 발린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에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느껴질 만큼 다정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마음이 평화로워 졌다.
그 후 환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성당에 들어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된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주님이 너무도 처절한 고통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의 고통을 해결해달라고 청하려는 주님이 너무도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데 대해 당황하게 된다.
보통 이런 자리에 앉아야 할 신은 인간이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주피터 신처럼 막강한 힘을 지닌 전능한 존재이어야 하는데 이들 앞에 십자가에 달린 주님은 무능하다 못해 너무 처참한 모습이시다.
여기에서 환자들은 큰 충격과 실망감을 느끼게 되나 이들은 이미 수도자들의 따뜻한 환대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 했기에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십자가를 정성껏 바라보면서 건강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십자가 체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십자가의 신학을 정리하게 된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 없이 들었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성서의 말씀을 자기의 병과 연관시키게 된다. 크리스챤의 고통은 많은 순간 일반 다른 종교처럼 자기 죄 값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주님 사랑의 특별한 표징임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 2:21)
그전까지 환자들은 오직 일념으로 주님께 매달리며 자기들의 병을 낮게 해주시기만 바라던 태도를 벗어나 주님께서도 자기들 못지않게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과거에 체험하지 못했던 어떤 위로와 병을 치유할 수 없다는 현실적 확인 속에서 신앙이 주는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환자들은 자기들의 병을 고침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챤으로서 주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길을 자기들은 병고를 통해 동참하고 있다는 데 대한 건강할 때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신앙인의 자부심도 느끼며 위안을 받게 된다.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죽어야 할 인생을 주님과 함께 고통 받는 것으로 끝낼 수 있다는 신앙의 위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지에 올 때는 병이 치유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다가 이제 병의 치유는 이차적인 것이 되고 이 고통스런 상태를 통해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는 신앙 의식으로 스스로 위로를 찾게 된다.
이때부터 환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큰 위안과 힘이 된다. 자신들의 병이 자기들의 죄값도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도 아닌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는 신앙이 주는 위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심약한 믿음 때문에 고통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주님께 치유만 매달리며 살았던 투병과정에서의 이기적인 신앙심을 뉘우치게 된다.
이 십자가 앞에서 환자들은 주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용감한 신앙을 달라고 청하며 자기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주님의 고통을 나누는 좋은 신앙의 시간임을 생각하며 앞으로 병고를 인내하고 감내할 수 있는 결심을 하게 된다.
병자들은 수도자들로부터 받은 환대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관념적인 것이 아닌 어떤 인간적인 사랑보다도 더 진실한 것임을 체험하면서 수도자들을 통해 교회의 모성을 체험하면서 신앙을 정리하게 된다.
즉 심화된 십자가 신학의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 가볍게 들어넘겼던 주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란 신앙인의 열망과 자기 발견을 통해 이 병을 치유 받는 것 못지않게 견디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크리스챤으로서 보람된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결심을 한 병자들은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실망이 아닌 새로운 크리스챤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차원 높은 신앙 수준의 각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신앙의 높은 차원인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른다는 차원 높은 신앙의 경지를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앞으로 자기 병고를 주님과 함께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가 지닌 많은 성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크리스챤적인 치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코 병 자체의 치유가 아니라 그 병을 통해 인격 전체의 치유임을 알리는 좋은 표징이 되고 있다. 이 십자가는 중세기 그리스도의 인성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그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것임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정착된 효과적인 표현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크리스챤 신앙이 줄 수 있는 차원높은 치유의 차원과 그들이 병의 고통 속에서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큰 위안,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요한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구리뱀 비유의 현실화라 볼 수 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 3:14)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고통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 인간들에 대한 더 없이 크고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셨으며 구약에 드러난 메시아의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주님의 말씀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허약한 믿음 때문에 주님을 배신한 벌로 하느님이 독사를 보내시어 벌하시자 당황한 백성들이 자기들을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청했을 때 하느님께서 보이신 자비의 표현이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 8-9)
이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겪어야 할 이유로 바로 신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신명기에 나타나고 있는 역할을 할 것임을 알리고 계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병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으로 성지를 찾았던 환자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을 향하게 된다.
이 수도회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민들레 씨앗처럼 온 세상을 날아다니며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리는 곳에서 그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치유를 오늘도 생기 있게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