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부활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연결된 상태다.
하느님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과 삼라만상이 살아 움직인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는 죽음이 없다고 믿는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는 사라지거나 꺼지지 않는 생명으로 부르고 싶다.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 인간 예수로 태어나신 육화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변화된 생명을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긍정적으로 연결될 때마다
하느님과 접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이 누리는 자유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과 접촉하는 사람은 생기를 얻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 (부활 성야 성수 예절)
이와는 다르게 부정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관계 안에서
증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반대한다.
이러한 부정적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제한한다.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설명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 반신불수,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려 한다.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거저 주시지 못하도록 만들어 왔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제한하는 것을
‘죄’ 또는 지옥의 상태라고 부르는데 ‘지옥’이란 실제로 지리적인 장소라기보다
의식의 실제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모든 보상과 처벌은 무엇보다 지금의 현실로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속에 본래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나게 하는 육화의 도구가 될 때
부활의 증인이 된다.
부활의 증인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만들어내는 용기로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자유를 준다.
부활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께서 죽음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입은 상태로 계시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몸이 어디서나 존재하는 ‘빛’으로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빛’이 하느님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은유가 되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비추는 빛,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비추는 빛
생명을 주는 이들이 비추는 빛
자유를 주는 이들이 비추는 빛
부활의 증인들이 비추는 빛이다.
그리스도의 빛은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변화가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활의 증인으로 오늘을 산다.
“빛을 믿음으로써 너희들도 빛의 자녀가 되어라.” (요한 12,36)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똑같은 신비에 참여하도록
그 과정을 돕기 위해 지금 여기에 계신다.
믿음의 개척자로, 믿음의 완성자로, 실천적 모델이며 안내자로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유된 빛으로 현존하시며
공유된 빛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우리에게로
우리에서 모든 피조물로 확장되도록 돕는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사람은 바로 너다.
2021, 4, 3. 부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