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과 부축의 여정.(공유하는 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동반하신 것 같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은 처벌이나 보복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가 15)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충분하시고 넉넉하신 나라다.
복음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충만한 은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보다
미래에 닥칠 지리적인 지옥에 대한 위협이 더 잘 기억되는 것 같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빼내시고
해방과 자유와 기쁨을 주시고자 우리와 동행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동반하신 것 같이 우리를 동반하시고
부축의 손길로 우리의 일상을 돕고 계신다.
그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동반하고 부축의 손길로 돌보아 줄 때
하느님의 선하심과 내가 실천하는 행동하는 자비가
공유하는 선으로 관계의 혁명을 만들어 낸다.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우리의 일상은 나로부터 해방되어 너를 살린다.
그분께서는 절망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성서를 풀이해 주실 때, 깨달음의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셨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 것이다.
부활은 전염되는 생명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제한시키지 않는 방법을 배운 이들을 통해
확산하는 선으로 너와 나를 감염시킨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매우 구체적인 예수를 사랑했다.
그리스도로 가는 다리를 놓은 것은, 먼저 개인적으로 사랑했던 여성이었다.
동반과 부축을 토대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현존,
부활하신 하느님의 현존이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었다.
우리의 내적인 여정, 곧 동반과 부축의 여정을 배우지 못한다면
변화된 삶에 대한 생생한 증인들이 없기에
우리의 신앙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여정을 향해 나아간 것은
예전의 예수를 단단히 붙잡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용서해주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써 나아갈 수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도 누군가를 동반하고 부축하는 변화의 길을 간다.
동반이 길을 함께 걷는 것이라면, 부축은 부축을 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산다.
상대방의 필요를 돌보아 줄 때,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돕는다.
먼저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말을 건네며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
정성을 다 기울여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 몫을 나눈다.
그처럼 부활하신 분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나를 떠난 사람.
곧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가 죽은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는 너를 동반하고 부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들이 판을 치는 천국에서
진짜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영광의 길을 걷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야 할 뿐 아니라
타인의 ‘다름’을 받아 들어야 한다.
다름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우리의 관계를 남남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나’를 죽임으로 ‘너’를 구원하는 길이 부활의 길이다.
아! 누가 이 죽음의 길을 영광이라고 했던가?
고맙게도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 당신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이 보여준 생생한 삶이 우리를 재촉한다.
개인적인 사랑과 친밀성의 증인들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사랑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내한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게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가 24,26 공동번역)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가 24,48)
동반과 부축,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최상의 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오늘도 너를 자유롭게 하려는 희망으로,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려는 마음으로,
내 몫을 찾아서 그 길을 걸으려 한다.
2021. 4. 7. 부활 8일 축제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