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하고,
헤로데까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을 예수로서가 아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도 아니고
다 과거 죽은 인물의 환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신 익희 선생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고들 했답니다.
그해 신 익희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그분을 닮았다는 거지요.
아주 웃기는 얘기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제 2의 이 완용이라고, 나쁜 뜻으로도 그렇게 보고,
프란치스코처럼 제 2의 그리스도라고, 좋은 뜻으로도 그렇게 봅니다.
만일 누가 제 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면 좋긴 해도 부담스러울 거고
제 2의 이 완용이라고 불리면 엄청 화가 날 것입니다.
부담이나 화나 다 나를 정확히 얘기하는 게 아니라
과하게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도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고
나빠도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봅니다.
남만 그렇게 볼까요?
그 버릇 남 주겠습니까?
어떤 때는 자기를 너무 비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무서운 재판관 하느님,
어떤 때는 너무도 인자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우리의 변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과장성과 극단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감정의 과잉 이입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완전 좋아>나 <진짜> 같은 말을
유행처럼 쓰고, 습관적으로 씁니다.
객관적인 그것은 완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나의 감정은 완전 좋은 것입니다.
완전히 좋은 것으로 느끼니 그 거 문제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완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이내 완전 싫다고도 할 것이기에 문제입니다.
주관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데도 나쁜 것, 악이 되고 맙니다.
<전혀>라는 말도 많이 씁니다.
<전혀>라는 말은 긍정적인 부사가 아닙니다.
완전 부정을 위해서만 쓰이는 부사입니다.
전혀 없다거나 전혀 몰랐다는 거지요.
언젠가 저의 청원기 형제 중 하나가
“우리 집엔 사랑이 전혀 없다.”고 하며 나가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사랑이 전혀 없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말을 한 줄도 몰랐기에 제 질문에 자기도 깜짝 놀라면서
사랑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자기 말을 수정하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부사를 씁니다만
이 무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기에 사랑이 많이 있는데도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객관을 왜곡하는 주관적 감정의 과잉 이입을 오늘 경계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하는지 돌아보며 못된 감정이입 말해진것들
부끄럽고 ,돌이켜 지며 주님의 은총 청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