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은 앎으로부터 온다.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산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린 성프란치스코의 기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각과 인식은 무엇을 알고 어떻게 아는가?
근본주의를 신봉하고 전통만을 주장하는 교만한 지식은
두 개를 놓고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데서
늘 우월한 입장을 갖고 사람을 대한다.
그렇게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 사람을 대하다 보면
삶의 깊이와 섬세함, 자비심을 갖고 관계를 맺을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의로움에 취해 상대방을 무시하고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 11,25-27)
단순함이 지혜를 동반하지 않으면 바보다.
어린이 같은 단순함에 경험의 지혜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우리는 삶이라는 학교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받아들여 관계를 만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며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전통이 비추는 거울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러한 인식이 균형을 이루도록 통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은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사랑을 최우선으로 하는 영성은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다른 전통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려고 하고
서로 나눌 것도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돕는다.
머리와 가슴과 몸이 하나로 통합되는 앎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 사랑인지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성서와 경험과 전통으로부터 하느님을 아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앎으로부터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인식이야말로 낙원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실재요, 미래가 아닌 현재며,
장소가 아닌 관계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상태다.
내적인 목표와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새로 태어나는 변화된 새로운 삶은 앎에서 시작된다.
앎이 변화의 길로 나가도록 돕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처럼 되어가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며
예수의 인간성에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육화하시는 삶처럼
나의 삶도 육화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너와 숨을 쉬는 생명체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필립비 3,8)
영원한 생명은 앎으로부터 온다.
알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하기, 배운 것을 내버리기, 내려놓고 내려가기,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와 타인들을 섬기기가 필수 항목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 눈앞의 복을 받으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배워 그분처럼 변화의 길을 가려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것이 앎이고 그것이 믿음이다.
그러한 앎과 믿음이 아니라면 쓰레기처럼 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빛에서 빛을 받아” 내어주는 생명으로 관계를 비춘다.
매일같이 변화가 많은 상황에서 내적 고요와 평화를 누리며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 누군가를 동반하는 선,
용서하는 자비, 흘러가는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땅이며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가 아닌 현재로 경험한다.
아! 내려가는 발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끝없이 오르려고 하던 내가
한없이 낮추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거기에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눈이 있다.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이 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