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내어드릴 만큼
내면적 가난함과 겸손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그네를 대접하다 하느님의 천사를 만났고
천사로부터 들은 말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희망을 일깨웠으며 결국 아들을 출산하였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느님의 의지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날로 깊어 갔다.
마침내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는 말에도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적인 고통과 슬픔이 왜 없었을까?
아브라함의 직관적인 지혜는 바깥이나 위로부터 왔다기보다
깊은 내면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가슴이 찢어지고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은 그의 내면을 찢어놓았다.
그는 찢어진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의 가난이었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 가난으로부터 겸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믿음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삶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은 진실에 직면해야 한다.
방해받는 관계의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키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거나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일단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덤빈다.
수많은 모색과 시도들이 실패와 헛수고로 돌아가고 난 공허한 빈자리,
자신이 내팽개쳐졌다는 느낌이 들 때,
그 공허한 빈자리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한다.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허물어진 관계다.
모든 관계 속에 있는 틈새, 금이 가고 균열 된 관계가 나를 가난해지도록 돕는다.
안전한 중심에서 편하게 지내기를 원하고
관계의 중심에 서 있으려는 의도들로 가득 찬 나를 그대로 놓아두고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십자가와 죽음 없는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한다.
수고와 땀 흘림이 없이 칭찬과 인정받기를 원하며
다른 이들의 수고를 훔치면서 자신을 높이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의도는 보이기 위한 것들이 전부다.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
심지어 반응을 조작해서라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경쟁하고자 한다.
엘리트 의식과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나’는 하느님과 단절된 ‘나’이며
너와 피조물과 단절된 ‘나’이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세상의 고난과 연대하고
하느님의 고난과 연대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사적으로 도덕적 완전함에 급급할 뿐, 믿음에 씨는 성장할 수 없다.
돌밭과 길바닥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표상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가난한 이들이다.
수없이 많은 가정에서 가족들의 관계가 심각하다.
심각한 관계 속에서 자신은 조금도 변화하려는 의지 없이
자신은 그대로 놓아둔 채. 다른 이들을 탓하고 덮어씌우면서
달콤한 경건, 사적 구원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것은 망상이다.
하느님과 피조물과의 연결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꼭대기에만 머물려는 엄청난 에고의 팽창을 유지하려고 바치는 그들의 기도,
도덕적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지키는 엄격한 잣대,
남들로부터 거룩하고 특별하며,
올바르고 안전하며, 높은 도덕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받고 싶은 욕망,
이런 잘못된 동기들은 실제로 하느님을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타인과 분리되고 섬김이 없고, 구체적인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믿음이겠는가?
믿음은 구체적인 사랑으로 드러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다 하느님의 천사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일상을 그렇게 살았다.
차별과 차이를 극복한 보편적 관계,
나만 특별하게 사랑받고, 특별하며, 선택받은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모두가 특별하게 사랑받고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보편적 구원을 향해 관계를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