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예수님의 정체를 사람들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2) 예수님의 실제 정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술 한 잔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이 동무가 성서 구절을 많이 외고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세례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예수의 말씀은 훌륭하기에 가르침 삼는다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른 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승일 뿐이었습니다.
복음을 봐도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는가?
스승님, 세례자 요한, 예언자, 예언자 중에서도 엘리아 등,
예수님 정체에 대한 여러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수님께서 알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그 질문은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한 편으로는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요구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신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스승 또는 예언자일 뿐인가,
아니면 나의 생사, 행불행, 구원을 쥐고 계신 구원자이신가?
가끔 길을 가다 보면 개신교 신자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례하면서도 도발적입니까.
구원에 대해 어찌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는지 비판도 하지만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그들의 확신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도 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그 분에게 나의 행불행과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전부를 그분에게 걸어야 하고 그분을 따라야 하지요.
그런데 구원자인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힘없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라고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구원자이신 분이 이 세상에서는 힘없는 패배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수난과 부활, 패배와 승리 중에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너무도 자명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밝히심에 이어
당신을 따르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가르치시는데, 여기서는
“자기 버림”과 “제 십자가 짊”을 “주님 따름”의 조건으로 가르치십니다.
가난과 십자가, 죽음과 고통.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해야 우리도 그리스도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 버림과 죽음의 희열을 느끼는
그 그리스도의 경지를 오늘 저는 흠모하고 갈망합니다.
1) 예수님의 정체를 사람들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2) 예수님의 실제 정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술 한 잔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이 동무가 성서 구절을 많이 외고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세례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예수의 말씀은 훌륭하기에 가르침 삼는다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른 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승일 뿐이었습니다.
복음을 봐도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는가?
스승님, 세례자 요한, 예언자, 예언자 중에서도 엘리아 등,
예수님 정체에 대한 여러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수님께서 알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그 질문은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한 편으로는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요구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신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는 스승 또는 예언자일 뿐인가,
아니면 나의 생사, 행불행, 구원을 쥐고 계신 구원자이신가?
가끔 길을 가다 보면 개신교 신자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례하면서도 도발적입니까.
구원에 대해 어찌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는지 비판도 하지만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그들의 확신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도 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그 분에게 나의 행불행과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전부를 그분에게 걸어야 하고 그분을 따라야 하지요.
그런데 구원자인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힘없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라고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구원자이신 분이 이 세상에서는 힘없는 패배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수난과 부활, 패배와 승리 중에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너무도 자명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밝히심에 이어
당신을 따르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가르치시는데, 여기서는
“자기 버림”과 “제 십자가 짊”을 “주님 따름”의 조건으로 가르치십니다.
가난과 십자가, 죽음과 고통.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해야 우리도 그리스도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 버림과 죽음의 희열을 느끼는
그 그리스도의 경지를 오늘 저는 흠모하고 갈망합니다.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하신 그리스도처럼 저도
이것을 기꺼이 수용할수있는 경지를 청하여봅니다
사랑에 따르는 수고나 희생은 내 몫이 아니라고 밀쳐버리는 나..
사랑의 달콤한 열매만을 즐기기에 급급한 위선적인 엉터리 신자인 나..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땀흘리며 수고를 아끼지않는 분들을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무례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아니라 박옥수씨를
중심으로한 '구원파' 이단(異端 )교파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성서의 특정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구원받은 성도라면
구원받은 시간과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하게 알고있어야 한다며
기존교인들을 미혹합니다. 정통 개신교회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러한 저돌적인 전도방식을 택하지 않지만, 구원파, 통일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다락방등 수많은 이단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교세 확장에 기승을 부리고있어 교회마다
성도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이단종파 교육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단들이 가장 많이 도용하는 이름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침례교'인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가 너무 많은 교단으로 나눠져있어 성도들이 일일히
구별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해 이와 유사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자” 이 구호가 공허한 메아리 되지않도록
신부님, 말씀방 벗님들께서도 한국 개신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요..
그리하여 나를 버림으로써 이웃을 위한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죽음의 삶을 살겠다고 새로이 다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