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을 선포하시고,
악령을 퇴치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시는 주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고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베드로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 이르는 열 두 사도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시고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관한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그리고 열 두 사람을 보내시면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당신과 정확히 똑 같은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과 똑 같은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입니까, 짐입니까?
물론 대단한 영광이지요.
우리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역할과 사명을 수행한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앓느니 죽지 하면서 숫제 자기가 다 해 버립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당신의 중요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대단한 믿음의 표시이고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영광으로 생각하기 보단 짐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형제들도 그렇고,
어떤 중요한 일을 부탁하면 아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 째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니라 인간 누군가가 부탁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꿈에 나타나 사명을 주십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명을 받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제가 부탁하면 잘 안 받아들일 것을 신기한 꿈을 꾸고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 같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통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사명이냐, 사람의 부탁이냐 잘 식별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르고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인간을 통한 하느님의 사명을 잘 식별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식별도 잘 못하고 실천도 잘 못합니다.
둘째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주시고 능력은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야박한 분이십니까?
돈도 주지 않고 물건을 사 오라는 식입니까?
역시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명과 더불어 능력을 주시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맡기면서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니 문제는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에서 땅 속에 달란트를 묻어 둔 사람처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도원 큰 책임을 맡을 때입니다.
어린 나이에
청원장과 공동체 원장이라는 두 책임을 동시에 맡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순종을 해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 책임을 제가 다 그리고 잘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끙끙 앓다가
지혜로운 선배 형제를 찾아가 의논을 했습니다.
그 때 형제님의 얘기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능력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너무도 각인되어 그 때 이후
저는 능력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한
하느님은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힘도 주시니 말입니다.
악령을 퇴치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시는 주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고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베드로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 이르는 열 두 사도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시고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관한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그리고 열 두 사람을 보내시면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당신과 정확히 똑 같은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과 똑 같은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입니까, 짐입니까?
물론 대단한 영광이지요.
우리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역할과 사명을 수행한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앓느니 죽지 하면서 숫제 자기가 다 해 버립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당신의 중요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대단한 믿음의 표시이고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영광으로 생각하기 보단 짐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형제들도 그렇고,
어떤 중요한 일을 부탁하면 아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 째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니라 인간 누군가가 부탁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꿈에 나타나 사명을 주십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명을 받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제가 부탁하면 잘 안 받아들일 것을 신기한 꿈을 꾸고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 같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통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사명이냐, 사람의 부탁이냐 잘 식별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르고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인간을 통한 하느님의 사명을 잘 식별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식별도 잘 못하고 실천도 잘 못합니다.
둘째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주시고 능력은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야박한 분이십니까?
돈도 주지 않고 물건을 사 오라는 식입니까?
역시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명과 더불어 능력을 주시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맡기면서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니 문제는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에서 땅 속에 달란트를 묻어 둔 사람처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도원 큰 책임을 맡을 때입니다.
어린 나이에
청원장과 공동체 원장이라는 두 책임을 동시에 맡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순종을 해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 책임을 제가 다 그리고 잘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끙끙 앓다가
지혜로운 선배 형제를 찾아가 의논을 했습니다.
그 때 형제님의 얘기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능력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너무도 각인되어 그 때 이후
저는 능력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한
하느님은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힘도 주시니 말입니다.
할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나의 하느님께 오늘도 감사 드립니다.
살다보면 기쁠 때 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다는 걸 느끼게 되더군요.
그러나 그 짧은 환희의 순간이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게 한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삶에서 고통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고통을 즐겨서가 아니라 삶의 진면목을 알기 때문이지요.
단, 고통을 주시더라도 견딜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