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의 용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는지?
이에 주님께서는 용서는 횟수를 따지며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그리고 용서는 끝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횟수를 따지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하는 마음과 자세의 표시이기 때문이고
사랑의 용서가 아니라 의무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한 다시 말해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매번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하지요.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는데 횟수를 정해놓고 용서합니까?
눈감을 때까지 용서하지요.
우리는 무한히 큰 사랑의 용서의 예로 부모의 용서를 드는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예로 드시며
자비한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자비한 임금은 무자비한 종의 만 탈렌트 빚을 면해 주는데
무자비한 종은 백 데나리온 빚 때문에 동료를 감옥에 처넣습니다.
한 탈렌트가 육천 데라리온이니 큰 용서를 받고
작은 용서도 하지 못하는 종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자비가 우리의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그러니까 단절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무자비한 종은 용서받고도 왜 무자비하였는가?
그것은 용서는 받았지만 자비는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만 받고 자비는 받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던 것입니다.
신체장애인이 아니라 자비 장애인이랄까 사랑 장애인입니다.
그것은 아홉 명의 이스라엘 나병환자와 한 명의 이방인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받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돌아온 것은 이방인 나병환자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이방인은 치유와 함께 사랑을 체험한 데 비해
이스라엘은 치유와 사랑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였고 그래서 사랑과 구원은 체험치 못햇던 겁니다.
자식들이 종종 그러하지요.
부모가 밥해 주는 것 당연하게 여기고,
사랑도 당연하고 용서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아무튼,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용서를 받고도
작은 용서도 실천치 못하는 무자비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
(상처받은 이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주님께로)
http://www.ofmkorea.org/376907
18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행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http://www.ofmkorea.org/137179
17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아무렇게나 사랑하는 것을 경계함.)
http://www.ofmkorea.org/109701
15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에 횟수를 따지지 마라!)
http://www.ofmkorea.org/81249
12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네 덕, 내 탓.)
http://www.ofmkorea.org/33438
11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의 횟수는 잊어버려라!)
http://www.ofmkorea.org/5247
10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Impotence)
http://www.ofmkorea.org/4294
08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http://www.ofmkorea.org/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