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문장에서 나의 눈길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이 문장에 눈길이 가기보다는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문장에 눈길이 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비를 이야기 할 때
용서를 이야기 할 때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항상 숙제로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문장에 집중하는만큼
용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답은 이 문장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이 문장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문장의 시제는 현재, 혹은 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비를 입은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집니다.
자비를 입어야지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용서 받은 기억이나 경험이 있어야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도
용서를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비를 입은 기억을 떠올리고
우리가 용서 받은 경험을 찾아야합니다.
내가 용서받은 기억이 있고
사랑받은 것이 떠오를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남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고
그렇게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상처 받은 기억들,
내쳐진 기억들은 생생한데,
사랑받은 기억들,
용서받은 기억들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합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해서
내 안에 상처만 남아 있어서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이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
‘아 내가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는구나’라고
나 자신을 알아보는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을 네가 인정해’라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내 공을 넘기면서
나 자신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해서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부족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때
그 사랑 안에는 우리의 부족함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도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어라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하지 못해도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는 내가 먼저 무엇을 해야한다는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남을 먼저 보기보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더 집중할 때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