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변화된 사람은
관계적 변화로 나아가며 관계적 변화는 보편적 변화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화가 없으면 변화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세 가지 관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며,
하느님과 나, 너와 나,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공유된 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세 가지 관계에서 체험되며
우리는 그 안에서 일치를 경험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선을 이루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시며
그분께서 내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신다.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알게 되는 신비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하시는 일로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희생이나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분의 선물이다.
그러니 자랑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로 나아가는 사람은 희생자가 되거나 희생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
아버지의 뜻과 복음의 목표는 우리가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기 때문이다.
참여하는 선은 도덕적 경주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선으로 참여하게 된다.
응답하는 선은 희생보다 자비를 행하는 것이며
용서하는 자비와 허용하는 자유로 관계를 살리는 일이다.
용서받은 기쁨은 용서하는 자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하는 만큼만 그분을 안다.
성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모방하고 사랑할 것을 강조했지
단지 예수님의 신성만을 예배하도록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예배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성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에서 이해보다 행동을, 정신보다 가슴을,
지성보다 사랑과 진리와 자비를 더 강조했다.
“은둔소를 지고 다녀라”하고 하시며
기도를 길 위로, 일상생활의 활동 속으로 옮겨 놓았다.
“세상 전체가 우리의 수도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관계를 살피는 일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우리들의 상호 관계, 우리를 둘러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분께서 관계를 맺는 방식을 우리도 배우고
그분의 관심사와 그분의 실천을 우리의 삶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도구 삼아 너에게로 흘러가도록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통치에 내 자유를 내어놓고
그분께서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 의지를 맡겨드리는 일이다.
변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
변화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이것을 회개, 또는 회심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