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이야기 6 - 성북동 신학원 건설
정동에 수도원 대지를 마련하여 수도원을 건축하고 이것이 공사만이 아니라 사용면에 있어서도 당시 한국 교회 수준에서 프란치스칸이 할 수 있는 예언적 봉사가 되자 그는 새로운 계획을 착수하게 된다.
바로 신학원 대지를 물색하는 것이다. 그전까지 프란치스칸 양성은 파견단의 재량에 의해 실시되었다. 자랑스러운 면은 어느 파견단도 진출하면서 먼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방인 회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서의 조그만 허점으로 볼 수 있으나 관구의 밝은 위상을 대단히 격하시킨 것이 바로 양성에 대한 태도였다. 우리나라에 파견된 여러 파견단은 멕시코를 제외하고 다 방인회원 양성을 자기 파견단의 첫 번 우선 관심사로 보았다.
그래서 캐나다 형제들은 진작 지원자들을 뽑아 캐나다로 파견하고, 이태리 형제들도 나름대로의 양성계획이 있어 함흥교구 신학생으로서 이태리에 유학 와서 프란치스칸 삶을 원했던 최근성 토마 신학생을 제노바 관구에서 받아 들여 양성시키게 했다.
그러다 얼마 후 대전에 지원자들을 모우기로 하고 여러 파견단에서 받은 지원자들을 목동 수도원에 모우고 이들 중 성직 지망자들은 광주 신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리 흡족할만한 성과가 없었기에 서울에 프란치스칸 신학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정동 수도원 앞에 있던 민간 가옥에 신학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원자들이 증가하면서 임시 피난살이와 같은 정동의 신학원 수준으로는 질 높은 양성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신학원 설립 계획을 세웠다.
헌데 당시 관구의 인력 사정으로는 이 조사 계획에 참석할 수 있는 형제가 안 베다 밖에 없었고 그는 관구의 여러 일을 다 하는 처지라 어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또 대지 물색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지금 성북동 수도원이 있는 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 자리는 당시는 변두리에 속하는 곳으로 개 훈련소가 있던 자리였다. 다행히 가격도 적당해서 구입키로 하고 계약금을 지불하였으나 얼마 후 땅 주인이 사정에 의해 땅을 매각할 수 없으니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해지하자고 제안했다.
신부님은 정중히 이 땅은 신학생들의 양성을 위해 신학원을 만들 자리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양해를 청하자 땅 주인도 자기 계획을 포기하면서 신학원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신부님의 생각이 얼마나 정확하고 깊은 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어느날 신부님께서 나에게 성북동 터에서 혜화동 신학교까지 얼마나 걸리는 지 한번 걸어보라고 하셨다.
자기가 걸어보고 시간을 체크 했는데, 자기는 키가 커서 보폭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내 걸음으로 정확한 통학 시간을 알고자 하셨다. 이것은 어려운 자연 환경에서 터득한 네덜란드인들의 정확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생각해도 최적지라는 생각이 드는 성북동 신학원을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건축 설계에 있어 당신이 관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정동 수도원 같은 공간 처리에 있어 실용성이 부족하고 그냥 공간 분할만 해서 살아가면서 불편을 느끼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71년 7월 30일 성북동 신학원이 축성됨으로서 대전 수련소와 함께 한국 관구의 양성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의 현실이 다 그러했기에 특별한 것이 없지만 성북동 신학원 시절은 경제적으로 참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다.
관구 경리이신 안 베다 신부님은 양성비에 좀 도움이 될 수있다는 생각에 아래 가게들을 준비하셨고 이것은 당시로서는 월세로 들어오는 돈이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 시절부터 살림을 살았던 처지에서 성북동 경제는 참으로 빠듯했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것이 당시 우리들의 현실이었고, 또 우리는 이것을 긍정적인 차원으로 받아 들였기에 프란치스칸으로서 지녀야 할 실재적 가난 훈련에 좋은 교육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때 원장님들은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후원회 같은 것도 없는 처지에 유일한 해결책은 근검절약이나 이것 역시 한도가 있는 것이라 그분들의 고충이 어떻했는지 나이가 들면서 더 생각이 난다.
신학원이 완공되고 나서 우연한 인연으로 대학생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원장으로부터 스페인어 교습을 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수도원에 왔다. 육영수 여사의 가정교육 덕분인가, 박근혜 양은 참으로 기품 있는 태도로 수도원을 드나들고 월말이 되면 강사료와 함께 주방에 필요한 생선이나 고기를 선물하는 선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당시로선 수도원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 원장님이 수녀원 미사를 가서 생기는 수입, 여기에 겹쳐 수녀원에서 키우던 개를 처분하기 위해 보냈는데, 사실 수도원에서는 영양 보충을 위해 이것을 잡아먹었다.
수도자들이 개고기를 즐긴다는 것은 내 개인적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나 양식으로 먹는다는 것은 가능하다고 여겼기에 개고기를 먹지 않는 처지에서 먹는 형제들을 도우는 마음으로 개를 잡아 요리를 만들었다.
찜찜하면서도 복음적 선택으로 생각해서 준비했고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단 생각이 든다.
신학원 주변은 큰 부잣집이 많은 동네이고 이런 집은 오래 동안 정원 관리를 잘 해서 주위는 수려한 경관이었기에 새로 지은 우리 신학원은 참으로 썰렁하게 보여져서 좀 조경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드디어 식목일을 즈음해서 청와대에서 나무를 좀 심어주겠다는 정중한 연락이 왔다.
하도 반가운 김에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단숨에 3층 원장님 방으로 뛰어 가서 이 낭보(?)를 알렸다. 헌데 원장님의 태도는 너무 담담하게 정원은 나무를 선사받아 만드는게 아니라 묘목을 사다 심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원장님의 이 의견에 모처럼의 기대가 깡그리 깨트렸으나 원장님의 뜻대로 당시 종로 5가에 있던 묘목 상점에 가서 50원짜리 은 행나무 묘목을 여러 개 사서 심은 것이 오늘 성북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외 땀땀이 이런 방법으로 사다 심은 묘목들이 자라 성북동은 이제 부끄럽지 않는 정원이 조성되었다.
성북동에 갈 때 마다 어른들의 혜안을 생각하면서 만일 그때 청와대의 호의를 받아 들여 나무를 심었다면 오늘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성북동에서 50주년 기념식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코로나 사태로 기억 수준의 기념으로 끝났으나 성북동을 세운 아폴리나리스와 여러 원장들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이 집은 학생 기숙사로서 너무 명당이란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이라 좀 축제 분위기에 빠져 소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앞이 탁 트여 웬만한 소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이 염려하신 신학원과의 거리 등 모든 면에서 참으로 신학원 부지로서 좋은 자리란 생각의 의의가 없다.
성북동 신학원의 기초를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이 시작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게 하니라 그분이 관구장으로 계실 동안 성북동 양성소에 보여준 그분의 태도는 앞으로 어떤 장상이라도 본받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