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가까이 모여듭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뭔가 떨어지는 것이 없을까 하고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뭔가 청탁을 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이것은 뭔가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찾는 바리사이와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아쉬운 것이 있을 때 달라고 하기 위해서만 찾는 우리와도 다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말씀을 듣기를 기대했을까요?
어제는 제가 며칠 후 주례하기로 되어있는 사람들을 면담했습니다.
이들의 혼인을 제가 주례하게 된 데는 사연이 좀 있습니다.
저는 보통 혼인주례를 잘 하지 않는데,
제가 혼인주례를 하게 된 것은 남자가 40대 후반이라서
젊은 신부들이 주례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보다 먼저 주례하기로 했던 신부님이
이들에게 퇴자를 맞아서 제가 주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이 퇴자 맞은 이유가 이미 결혼하기로 한 그들에게
나이 차가 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겠냐며
걱정하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주례 사제에게서 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축복의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도 이러했을까요?
어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러 왔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면
그것이 어떤 말씀이건 자기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고
자기들을 꾸짖는 말씀일지라도 필요한 말씀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릴 정도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아니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싫다고 밀어내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셨고 음식도 같이 드셨습니다.
며칠 전 식사를 하면서 형제들과
家族과 食口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얘긴즉슨 가족이 혈연에 의해 맺어진 한 공동체라면
식구는 혈연과 상관없이 맺어진 밥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혈연에 의해 가족이고
식구는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밥을 같이 먹는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런 식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잘못된 표현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인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내친 적이 없기에
받아들일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잃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원래 한 식구였는데 잃었던 것뿐이고
그래서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었고,
더 나아가서 애타게 찾던 우리의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기에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리지 않고, 내 입맛대로 요구하지 않고 모두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오늘 이 복음을 읽은 저의 큰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가까이 모여듭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뭔가 떨어지는 것이 없을까 하고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뭔가 청탁을 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이것은 뭔가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찾는 바리사이와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아쉬운 것이 있을 때 달라고 하기 위해서만 찾는 우리와도 다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말씀을 듣기를 기대했을까요?
어제는 제가 며칠 후 주례하기로 되어있는 사람들을 면담했습니다.
이들의 혼인을 제가 주례하게 된 데는 사연이 좀 있습니다.
저는 보통 혼인주례를 잘 하지 않는데,
제가 혼인주례를 하게 된 것은 남자가 40대 후반이라서
젊은 신부들이 주례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보다 먼저 주례하기로 했던 신부님이
이들에게 퇴자를 맞아서 제가 주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이 퇴자 맞은 이유가 이미 결혼하기로 한 그들에게
나이 차가 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겠냐며
걱정하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주례 사제에게서 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축복의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도 이러했을까요?
어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러 왔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면
그것이 어떤 말씀이건 자기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고
자기들을 꾸짖는 말씀일지라도 필요한 말씀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릴 정도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아니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싫다고 밀어내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셨고 음식도 같이 드셨습니다.
며칠 전 식사를 하면서 형제들과
家族과 食口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얘긴즉슨 가족이 혈연에 의해 맺어진 한 공동체라면
식구는 혈연과 상관없이 맺어진 밥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혈연에 의해 가족이고
식구는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밥을 같이 먹는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런 식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잘못된 표현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인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내친 적이 없기에
받아들일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잃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원래 한 식구였는데 잃었던 것뿐이고
그래서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었고,
더 나아가서 애타게 찾던 우리의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기에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리지 않고, 내 입맛대로 요구하지 않고 모두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오늘 이 복음을 읽은 저의 큰 과제입니다.
사랑은 자아의 확장이라고 한 글귀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바로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닮아가는 과정이고,
그 사랑에 경계를 둘 수 없음을,
그 사랑이 바로 무한이고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로 알아듣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죽음과도 같은 한계상황을 늘려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요.
유한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한계를 모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오늘을 살겠습니다.
제 자신의 자아확장을 위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