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하나의 신비다.
성프란치스코의 영적인 출발은 육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이었다.
수난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육화의 겸손에 이르는 사랑의 길이었다.
악과 죄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에는 자비와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부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우리에게 꺼지지 않는 희망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십자가는 선으로 악과 죄에 저항하는 관계에서 발생하지만, 부활을 예비하는 것이다.
믿음의 현장에서는 십자가와 고난을 믿는 것보다 부활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더 큰 믿음이 요구되며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언제나 십자가와 고난이 따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기에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활을 내다보는 믿음은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성장한다.
우리의 인생은 고난을 통해 자기에게서 해방되는 여정이다.
부활은 해방을 통해 자유와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다.
나는 내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삼아라,
내가 그랬듯이 잠시 견디고 있어라, 그것이 네게 뭔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생명을 잃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부활은 언제나 죽음 뒤에 있다.
너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고난은 나를 위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게 되는 과정이다.
나의 고난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다.
사랑은 고통과 고난과 십자가를 동반하지만 기쁨에 차 있다.
부활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고난을 겪어낼 힘이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관계의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멀어져 버린 사람들, 단절된 사람들, 내가 금 밖으로 밀어냈던 이들과
나를 억압하고 방해하고 무시하던 이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경축하는 성탄의 신비는 죽음과 부활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을 이룬다.
성프란치스코의 영적 여정이 수난의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내 믿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관계 속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가
나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거처 너를 받아들이는 데서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회심은 자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생명과 힘을 전해 줄 기회가 생긴다.
회심과 회개는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에게서 내가 죽는 것이지만 나에게 생명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므로 부활을 내다보는 신앙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살이고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서 너를 향하여 있을 때
죽는지 모르게 죽는 사랑의 구체적 진실이 드러난다.
성탄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하나의 신비다.
이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신비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너와 나 사이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신다.
관계의 혁명을 마련하시는 새 창조의 역사에 나를 육화의 도구로 쓰신다.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 사랑이신 분께서 사람으로 오셨다.
인간의 존엄성에 제한을 두지 않는 사랑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의 눈높이와 동등해지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발아래서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발을 씻으신다.
빵과 포도주로 우리를 먹이시며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 우리 안에서 샘이 마르지 않도록 하신다.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유역에 너와 내가 살고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깨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