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 1,5)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러나 그 빛이 드러나는 곳은 어둠이다.
우리는 그 빛을 보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둠은 자신으로 가득 찬 나이다.
이 시대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거나 내려놓는 문화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하강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상승이라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이익과 편안함과 즐거움에 편승하여 노예처럼 살고 있다.
의학과 과학과 전자산업이 발달하면서 정보를 통제하고 속도감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지배를 위한 통제에 자신의 모든 힘을 소비하면서 꼭대기를 찾는다.
아무리 열심하고 성실하게 종교적인 실천을 해도 소용없다.
자아가 위기를 겪는 이러한 시대에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진리는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피조물과 사람의 만남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참된 인간과 참 하느님과 만날 때 그 진리로 인해 관계가 재조정되어
너와 나 사이에, 피조물과 나 사이에 새로운 관계의 문이 열린다.
그것이 믿음을 기초로 한 영성이며 신학이고 회심이다.
나는 내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 성서에 나타난 욥을 바라보았다.
욥은 어둠 속으로 하강하는 인간의 여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를 내어놓는 위대한 포기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가치와 주권을 상실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주지만,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해있던 거짓 자아의 벽을 허물어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부활이 자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웠던 욥의 여정과 같이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믿음의 싸움을 자신과 해야 했다.
아직도 나는 저물어가는 내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내 어둠을 비추고 계신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셔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어둠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나를 비춰주시는 빛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회복된 욥의 상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며 폐쇄적인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여정도 그러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과 왜곡되고 경직된 교리와
인습과 전통에서 나온 영웅적 이상주의가 만든 종교심이 진정한 신앙을 대치해 왔다.
진실이 아니라 진실에 근접해있는 것, 유사한 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신앙은 위험하다.
욥의 친구들처럼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우상도 그러하다.
신앙의 대체물이 신앙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심을 그렇게 이해해 왔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요한 1서 2,11)
수없이 바치고 규율을 준수하는 도덕적 성실이 만남과 관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만날 수 없고 ‘너’와 피조물을 만날 수도 없다.
어둠이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교심이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고 하느님 안에서 끝나지만
나로부터 출발하는 종교심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로 끝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오로지 나만을 위한 삶이라는 자만심의 벽을 넘을 때
비로소 신앙이 주는 해방을 경험한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면 너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너’는 고분고분한 ‘너’가 아니다.
너무나 다른 ‘너’를 받아들이려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의 고난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배우고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도록 허용하는 자비를 그분으로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이며.
무섭도록 외롭고 고독하고 허전할 때 바라보아야 할 유일한 분이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시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자들은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29)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나를 외면하고 금 밖으로 밀어낼 때
나의 단절감을 내가 어떻게 견디어 내고 있는가?
외로움의 고통을 넘어 어둡고 고독한 내면에서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과 대면하게 된다.
말씀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가장 잘 준비된 밭,
내가 사라진 그 땅에서 하느님의 경작이 시작된다.
하느님의 낙원이자 우리들의 낙원을 만드는 땅, 마음의 밭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나에게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너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고,
피조물 안에서 발견된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게 할 것이다.
너와 내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기쁨에 넘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응답하는 신앙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더 아래로 내려가라고, 더 낮아지라고, 더 가난하고 겸손하게 섬기라고…
하느님의 자비가 육화되는 땅,
하느님의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는 유역에서 우리는 만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만남이다. 진리가 싹트는 만남이다.
내려가는 발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오신 분,
사람이 되신 말씀을 비천한 말구유 안에서 발견하려고
어둠을 비추시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감탄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