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 안토니오의 환시 (1656)
작 가 : 바르톨로메오 에스테반 뮤릴로(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
크 기 : 제단화 캠퍼스 유채 6M
소재지 : 스페인 세빌리아 대성당
예수 성탄은 종교적으로 예수님의 탄생 기념을 확인하는 날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교가 만든 허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인물임을 증명하고 이것을 기리는 날이 아니다. 성서는 그분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교리나 윤리 교과서도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삶을 감성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면서 그분의 선물을 받기 위해 양말을 걸어두는 풍습에 포함되어 있는 감성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탄생하셨으니 분명히 유년기 소년기 사춘기와 같은 여느 인간의 성장 과정을 겪었을 것이기에 어린 시절도 있었겠지만 복음이 너무 교리 표현의 수준으로 변질되다 보면 감성적 차원은 발 부칠 데가 없는 경직된 칙령 선포가 되기 쉽다.
다행히 가톨릭교회는 어느 종교 못지않게 체제 중독증이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이성과 지성을 승화시켜 숨을 쉴 수 있는 감성적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큰 장점이요, 멋스러움으로 존재하고 있다.
귀족 풍속에서 연유된 대단한 복장을 한 고위 성직자들이 너무도 초라한 마굿간에서 탄생한 말구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경배하는 모습은 가톨릭교회의 생명을 알리는 좋은 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초세기 부터 가톨릭교회에는 민간 신앙의 차원에서 아기 예수에 대한 신심이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런 신심이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착되면서 여러 곳에 아기 예수님을 위한 성지가 정착되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필리핀 세부(Cebu)도시에 스페인 정복자 마젤란이 오면서 모셔 왔다는 아기 예수 상을 모신 성당이 있고 스페인어로 산토니뇨(Santo Nino)의 신심은 필리핀인들의 구심점으로 정착되어 있다.
또한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아기 예수상은 더 유명하다. 스페인 세빌리아 수도원의 어떤 수사가 성모송을 외며 성당 바닥을 청소하던 중 “태중에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다”는 기도가 나왔을 때 “내가 바로 그 예수다”라는 소리가 들렸으며 밀랍으로 자기 형상을 만들어 성당에 모시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많은 순례자들이 순례하면서 일약 명소가 되었다.
그 후 이 지역 군주의 딸이 보헤미아 왕가로 시집가면서 가보와 같은 그 예수상을 모시고 갔는데, 이곳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아기 예수상은 가르멜 성당에 모셔지고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딱딱한 교리나 경직된 교회법이나 규정보다 이 신심은 가톨릭 신앙을 더 인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불행한 고아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다행히 어릴 때 예술적 자질을 인정받아 좋은 스승 밑에서 지도를 받아 당시 대단한 규모의 도시였던 세빌리아에서 명망 있는 작가로서의 생활을 했다.
세빌리아의 대성당 규모는 당시 이 도시의 위상을 잘 알리는 것이나 이 도시에는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이 공존하고 있었다.
먼저 식민지에서 가지고 많은 은으로 이룩된 화려한 대성당과 같은 대단한 부가 있었던 반면 페스트의 창궐로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 상태에서 생긴 걸인과 고아들이 넘치는 도시라는 상반된 모습이 있었는데, 작가는 이 두 현상을 잘 수용해서 전혀 다른 상황의 표현으로 폭넓은 사회상을 표현했다.
그는 먼저 당시 풍요로운 처지에서 교회에 봉헌한 많은 돈으로 이룩된 아름다움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표현함으로서 그의 작품은 명암이 교차하는 사회 전체를 아름다움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전 시대를 살았던 이태리 화가 라파엘로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작가로 인정받았는데, 이런 화려한 경력으로 들뜨거나 우쭐하기 쉬운 인생의 함정을 프란치스칸 영성으로 극복하면서 참으로 상쾌하면서도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성화이나 앞에 언급한 대로 당시 세빌리아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소년 거지들, 냉차 장수 등 어두운 부분도 아낌없이 재현하면서 이들을 통해서도 희망과 빛을 보인 것은 두말없이 그가 프란치스칸 재속회원으로서 영성적 가치를 깊이 이해했던 그의 실천의 결실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고통 받는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뜻있는 부유한 귀족들의 희사로 교회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이런 불행한 가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가의 작품 경향은 평안하고 따뜻한 것이 특징인데 이 작품은 이런 작가의 특성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5세 되는 해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수도 생활이 가장 큰 인생의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다가 서품 다음 해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 기성 수도회였기에 안정된 가번을 둔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회원이었는데, 새로 시작된 프란치스칸 수도자 5명 이 모슬림 국가인 모로코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해서 귀환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기 생활의 새로운 전기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귀족의 자녀로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아우구스티노 회를 떠나 새로 시작되어 모든 것이 불편하고 서툰 프란치스코 회에 입회해서 그에게 충격적 감동을 준 순교자의 삶을 계승하기 위해 곧 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소망대로 무어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모로코로 파견되었으나, 도착 직후 병으로 인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1221년의 아시시의 포르치운쿨라서 개최된 프란치스칸 총회에 참석했다가 코임브라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고행생활을 했다.
마침 어떤 사제 서품식에서 강론을 맡은 신부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대신 한 강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줌으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에 관계되는 것이지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이태리 파도바에 가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 시대에 필요한 여러 일들을 하다가 1231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죽음으로 그의 인생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보였던 복음적인 행동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 표현이 드러나면서 그는 일약 민중들 사이에 인기 성인이 되었다.
그 후 어느 성당이던 그것이 비록 프란치스칸 성당이 아니더라도 성 안토니오의 동고상이나 상본은 반드시 모시는 필수 성화가 되었으며 이 작품 역시 그 큰 세빌리아 성당에 안토니오 경당을 만들면서 거대한 성화로 제작된 것이며 왕으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받던 것이었다.
이 작품은 성인을 공경하던 어떤 순례자가 탈혼 중에 본 것을 표현한 것이며 작가는 이 주제의 작품을 여럿 남겼다. 성 안토니오가 성체를 모신 앞에서 성경 읽기에 심취하고 있을 때 아기 예수님이 많은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나타난 장면이다.
안토니오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의 풍요로움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라면 성서 어느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표현 외에는 다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나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예수님 자기 삶의 정황에서 만난 예수님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예수님을 삶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만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을 일상의 삶에서 더 실감 있게 공경할 수 있도록 안배하시는 그러기에 성 미술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더 풍요롭게 각인할 수 있도록 안배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개신교 신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모습은 우상숭배라는 두려움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개신교도였던 렘브란트가 너무도 정확히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지만 개신교도들에게는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신교 신자인 그가 제작한 예수상도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우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각된다.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유일하게 더 나아가 광적일 만큼 무분별하게 사랑받는 예수의 모습은 위너 샬만이라는(Warner Sllman : 1892-1968) 광고업자가 그린 예수님의 모습인데 이것은 영락없는 영국인 미국인의 원조인 앵글로 색슨 인의 모습이다.
미국에 온 개신교도들은 미국을 개신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기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영어로 WASP로 표현했다. 즉 미국인은 먼저 백인이어야 하고 백인 중에서도 앵글로 색슨 즉 영국 혈통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개신교 신자여야 한다는 오늘 생각하면 해괴한 논리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예수의 모습이다.
또 오늘 우리나라 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예수님이 세상 성공의 상징인 미국 출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국가는 이런 개신교도들의 편협하고 비 복음적인 생각을 비웃는 듯 다민족 국가가 되었고 더욱이 개신교 신자들이 대종인 처지도 벗어나 단일 교단으로는 가톨릭이 우위인 나라가 되었으며 불교 이슬람 기타 여러 민족이 믿는 종교들이 어우러진 나라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 이 작품은 가톨릭 신앙의 포괄적인 예수 이해를 너무도 인간 마음에 와닿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프란치스칸 재속회원으로서 프란치스칸 영성을 삶 전체로 온전히 살았기에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다 하느님 선성의 표현이었고 비참한 가난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와 안토니오를 너무 존경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특히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안토니오를 주제로 한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여러 점 남겼으나 이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대작이었다.
보통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는 작품으로 보기에 구별이 잘 되지 않는데 아기 예수를 안고 백합꽃을 들고 있는 작품은 성 안토니오로 보면 틀림이 없다.
안토니오가 성체 앞에서 성서를 펴고 기도할 때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탄 날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매일 성서 안에서 성체 조배하면서 새로 탄생하신 하느님을 만난다는 신앙의 튼튼한 바탕을 표현하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회칙 ‘인간의 구원’ 10항에서 “복음이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매혹적인 태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아름다운 작품은 바로 교황님의 말씀을 아기 예수와 안토니오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너무 의미심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