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율법학자들과 토론하시는 소년 예수
작 가 : 알브레이트 듀러 (Alberecht Durer:1471-1528)
크 기 : 목판 유채 (65cmX80cm)
소재지 : 마드리드 테센 보로네미사 미술관
신약 성서의 루카 복음에는 예수님의 성탄 소식에서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전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 성탄을 통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지상 사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좋은 기사이다.
성탄의 내용은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정리를 위해 고향으로 가다가 베들레헴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한 처지에 산기를 느낀 마리아가 마굿간을 빌어 예수님을 낳았고 이때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던 당시 사회 구조에서 최하 천민인 목동들이 별의 인도로 예수 아기를 경배했다는 내용이 베들레헴의 성탄 소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어서 먼 나라 동방에서 고귀한 삶을 살던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와서 예수 아기를 경배한 후 이 아기야말로 구세주임을 알아보고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들은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 아기가 태어나신 정확한 위치를 몰라 헤로데 왕에게 가서 위치를 묻자 자기의 신분에 위험을 느낀 헤로데는 박사들이 떠난 후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을 모두 살해할 계획을 세우자, 천사의 도움으로 이 계획을 안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웃 나라인 이집트에 가서 피신했다가 돌아와서 나자렛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소년 시절(루카 2:40-52)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으로서 자질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예수님이 성인이 되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분 삶의 목표인 하늘나라를 위한 선교 여정을 시작하신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역사이다.
성경은 이후 예수님의 생애의 근 20년간의 역사에 침묵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떤 역사적 지식 부족한 일부 무식한 불교도들이 예수님은 부처의 제자라는 황당한 논리 전개에 이용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 약 5세기 늦게 탄생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예수님이 성인이 되어 인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는 것은 황당한 무지의 결론으로 남아있는데, 사실 무식해서 의심하기 좋아하는 종교인들 중에 드물긴 하지만 예수님이 부처의 제자였다는 황당한 논리를 펴는 무지가 만든 편견과 광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반론을 제시 할 만한 가치도 없는 유치한 낭설에 불과하다.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그것의 정확한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라는 것이 가톨릭 수도자들도 불교처럼 독신을 지키고 예식 때 촛불을 켠다는 것 등을 증거자료로 제시하는데, 이것 역시 일고의 토론 가치도 없는 유치한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소년 시대를 언급하면서 예수야 말로 우리와 너무나 닮은 인간이며 예수님의 성장 과정 역시 여느 인간들처럼 여러 관계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데 목표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소년 예수님이 당시 박학한 종교인으로 처신 하던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신이 바로 된 율법학자들은 자기 소년 예수님의 지성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율법 교사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6)
작가는 헝가리에서 금은 세공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모의 영향으로 당시 독일에서 교통의 요충으로 대단한 부를 누리고 있던 뉴른베르그로 이주해서 유복한 생활을 하던 부모의 영향을 예술로 돌릴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유전적인 자질과 함께 당시 르네상스 예술의 진원지였던 로마와 베네치아를 방문해서 당시 최고 수준의 예술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반대하며 일어난 루터의 개신교를 믿었으나 그의 예술적 기질이 개신교의 편협성에 갇히지는 않았다.
오늘날 독일에는 과거 가톨릭 성당이 개신교회로 변한 교회가 많은데, 놀랍게도 개신교로 남으면서도 가톨릭교회가 만든 성상이나 성화들, 심지어 성체를 모신 감실 까지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이성적 신앙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는 개신교 신자가 되고서도 가톨릭 교회의 성화를 많이 남겼으며 심지어 성모님에 대한 것도 과감히 표현할 만큼 열린 신앙인이었다.
율법학자들은 바로 하느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느님의 뽑힌 사람으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다는 착각을 철저히 하던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성향의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열심한 인간과 열심치 못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이와 교회라는 조직의 강화와 자기 이익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며 특히 우리처럼 제도화된 강한 조직을 가진 교회에서는 이것이 더 심하고 위험이 될 수 있다.
작가가 이 주제를 선정한 것은 당시 자기가 떠난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새로 시작된 개신교의 참신함을 증거 하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개신교는 새로 시작되었기에 전통으로 축적된 가톨릭교회보다 엉성하게 보일 수 있지만 복마전의 양상을 띄고 있는 부패한 가톨릭교회 보다 순수하다는 나름대로의 개신교 전향의 신앙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 가운데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였다.”(루카 2:46)
소년 예수님과 일생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온 것으로 인정받아 율법학자가 된 표정은 전혀 상반된다. 단순히 연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청순함과 노화가 주는 퇴락한 모습이 아니라 인생을 바로 살고 있는 인간과 바로 살지 못한 인간이 보이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학자들이라면 오늘날 교회에서 고위 성직자 서열의 대단한 외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실재 삶은 참으로 사악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고, 여기에다 가톨릭교회처럼 튼튼한 조직의 보호는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진리라는 맹신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예수님 오른편의 늙은이 율사는 참으로 흉측한 모습이다. 천성적으로 얼굴에 결함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잘못된 성형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볼 수 있는 더 없이 흉측한 모습이다.
태어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 보다 잘못 성형된 모습의 얼굴이 더 보기 흉측하다는 것은 종교인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모습이다. 무신론자나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된 모습 못지않게 종교를 잘못 믿고 있는 종교인의 추악한 모습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불법과 위법으로 가득차 있다.”(마태 23: 27-28)
우리는 시각적으로 간혹 역이나 명동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간판을 매고 떠들거나 대형 교회 목사로서 전속 법조인이나 아나운서까지 동원해서 떠들어 무지한 대중들을 모으고 있는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떠들지만 실재적으로 예수의 가르침과는 대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둥지를 틀고 있는냐에 따라 그 종교의 향기와 추악성이 드러나게 된다.
종교의 추악함은 일반 사회 어느 집단보다 사악함이나 더 사악하고 추악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작가는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다.
흉측한 표정의 율사들은 성경을 들고 있으나 이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보다 자기들의 권위를 합리화해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권력의 수단으로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에 트집을 잡을 것을 찾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성서를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하나같이 칙칙하고 어둡고 의심에 찬 모습들이다. 반면 소년 예수님은 마치 형사 취조실과 같은 분위기에서도 너무도 안온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자기 삶의 근저에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나 누구를 두려워하라 내 살을 먹으리라 달려들던 악한 무리 비슬비슬 쓸어지니” (시편 27장 1절)
작가는 소년 예수님과 율사들의 토론이 진지하면서도 격렬함을 얼굴의 표정으로서가 아니라 손놀림으로 표현하는 대담함을 보이고 있다. 소년 예수의 손으로 보이는 손과 율사들의 손으로 보이는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여러 거짓과 위선이 뒤엉킨 세상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선 긴 수행의 여정이 필요하다는 것, 진리는 언어적 유희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투사한 것으로 찾을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당시 부패한 집단의 상징과 같은 가톨릭교회와 순수한 복음적 열정을 살고픈 사람들로 시작되는 개신교의 모습을 통해 크리스챤들이라면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 할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다 부패할 수 있고 종교가 대형화되고 조직화되면 이 부패는 더 심각해진다는 것, 그러기에 크리스챤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무조건 다 복음이 아닐 수 있기에 교회가 복음으로 정화되고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가톨릭의 부패에 넌덜머리가 나서 떠난 개신교들의 부패 역시 중세 가톨릭의 부패 못지않게 심각한 오늘 한국 종교의 현실을 보면서 이 작품은 오늘 종교 현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알리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런 참상을 미리 예견하신 듯 성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