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어 가는 것이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내 존재에 창조의 숨을 불어넣으신 분께서
당신과 비슷한 존재로 나를 지어내셨다.
그 생명은 때 묻지 않은 순수였다.
젖먹이를 벗어나자 생존을 위하여 ‘나’를 찾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한 삶인가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세례는 선포였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선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후반부의 인생에 접어든 때의 일이었다.
종교적 행위가 중심이 되는 삶에는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예배와 율법에 충성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누가 힘이 있는가?
힘의 논리가 권력이 되고,
자신을 높이는 논리가 명성이 되며
독점의 논리가 소유로 남는다.
권력과 명성과 소유가 자만을 불러와 단절과 파멸로 관계를 망친다.
나는 내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내 밖에서 기쁨을 찾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행복한 기쁨을 발견한 곳은 관계였다.
하느님과 너와 자연 안에 있는 피조물과 만남을 통해
관계를 배우고 관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십을 넘어 육십에 이르러 비로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내가 누군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아는 만큼 나를 알게 되었고 나를 아는 만큼 하느님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에 눈뜨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받은 사랑에 응답하면서 나를 알게 되었다.
응답하는 신앙이 자리를 잡으면서 관계 안에서 기쁨이 생겼고
기쁨은 너를 기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더욱 커졌다.
관계의 원리는 너와 나를 묶어주는 성령의 숨결이다.
일상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눈에 비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 실존의 현재를 바라보고
용서로 공간을 만들어 너를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신다.
누가 자유를 주는가?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한 이들에게,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들이
중노동에 가까운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하며
겸손한 관계와 필요성에 쏟는 것이 더 현실적인 자유를 주는 일이다.
우리의 권위는 사랑하는 권위다.
사회적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과 가까이 살아가는 데서 오는 권위다.
내가 만나는 일상의 관계들 안에서 먼저 다가가서 먼저 주고
네가 주인공이 되도록 나는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네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너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변화될 때만 사랑하겠다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손에 든 자비와 선의 도구요 육화의 도구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셨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사람이다.
또한 허상이 아닌 실재요 가면을 벗은 정직함으로
그분을 따라가는 과정의 충실로 관계를 넓히려 하는 사람이다.
나를 통하여 너에게로 흘러가는 선이야말로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 지금, 여기에서 발견하도록 돕는다.
사랑만이 중요하다.
권위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모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