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나는 모난 돌이었으나
부딪고 깨어지고 깎이다 보니
반짝이는 조약돌처럼 되어 가고 있다.
나는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에 속하기를 원했으나
번쩍이는 빛에 눈이 멀어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처럼
부정적이고 불리한 것들과 캄캄한 어둠을 받아들여
보이지 않는 손길에 나를 내어 드리게 되었다.
비극적인 경이로움에 동의하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강렬한 빛에 눈이 멀었으나
감당할 만한 빛에 의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나를 쓰라리게 했던 패배의 위협들,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려던 시도를 멈추면서
죽기 전의 죽음은 창조 때의 순수한 양심에 빛을 비추시는 분을 알아보게 하였다.
성령과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문은 내적인 현존과 신적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무질서와 불완전을 통합하는 영성,
죄를 포함하는 영성,
어둠을 밝히는 영성,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는 영성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문제였다.
오직 사랑만이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옳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사랑에 호소했어야 했다.
거룩한 가짜들이 죄와 실패의 원인을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배반과 험담과 공포에 찬 지옥으로 끌어들여
자아도취에 중독되어 앞을 분간하지 못할 때
나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수난의 사랑과 육화의 겸손에 빠진 프란치스코의 안내를 받아
황송하옵게도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시는 분을 만났다.
가난과 작음과 단순성 안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을 만나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깨끗하고 정직한 존재론적인 성찰이 가면을 쓴 천사를 물리치도록 이끌어 주었다.
겉치레와 화려한 치장으로 만든 가면, 가짜들의 천국에서 즐기던 가면이었다.
그것은 거저 주시는 은총을 종교적 행위를 통해 가로막았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짜 맞추는 가짜들의 믿음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여덟 가지 행복은 무질서처럼 보이는 것들을 통합시키는 영성이다.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영성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현실에 대한 정직성으로 깨닫게 되는 은총이었다.
신앙은 복종이 아니라 관계적 삶이다.
하느님의 숨겨진 본질과 사랑의 가장 신비스러운 손길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 조건 없이 전달되는 선의 구체적 행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며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피상적인 ‘나’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순수로 지어내신 ‘나’의 가장 연약함을 통해서 그분은 일하신다.
약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관계적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
관계적 마찰에 감염되지 않고 내적인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사랑은
아버지의 품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나의 전반기 인생에 필요했다.
삶의 충동과 통제와 억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기 인생을 사는 나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여덟 가지 행복은 가짜 자기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없어도
순수한 은총과 풍요로운 세상을 지금 여기서 누리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역설에 담긴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저마다 회심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