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모두”라는 말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은총을 받았다면,
그러면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겠지요.
그런가?
자문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올 해 저는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다음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지금 저는 은총을 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은총을 주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주셨기에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 틀림없지만
은총을 느끼는 나를 중심으로 보면
제 탓으로 저는 은총을 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성탄을 앞두고 고백성사를 보면서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 하느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감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T.V를 보는 그 순간에도,
누구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잠자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못마땅해 하며 속으로 욕을 퍼붓는 그 순간에도,
심지어 욕정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에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런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은총은 주시지 않고 저와 함께 계시고
저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 사랑 없이 저를 감시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태양이 빛을 비추지 않고 내 위에 있을 수 없듯이
은총의 하느님도 은총을 베푸심 없이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방안의 난로가 꺼지지만 않았다면 있는 것만으로 온기를 전하듯
사랑의 하느님은 함께 계심이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함께 계심을 한 시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어찌 하느님의 은총은 느끼지 못하였던 건가요?
추운 데 있다가 들어오면 난로의 따듯함을 느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쐬면 빛을 느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넘치는 주의 은총, 한량없는 주의 사랑이 저로 하여금
은총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을 흘려버리게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불감증은 제 탓이 아니고
너무 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탓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는 난로 곁에 앉아서 난로 불을 쬐어야겠습니다.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있어봐야겠습니다.
너무 일이 바빠 온기만 누리고 난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불을 쫴야겠습니다.
관상은 그래서 일의 멈춤이고
부러 곁에 있음이고 부러 쳐다봄입니다.
그러니, 한 해의 마지막 날만이라도
하던 일 멈추고 은총을 좀 관상해 볼까요, 우리?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모두”라는 말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은총을 받았다면,
그러면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겠지요.
그런가?
자문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올 해 저는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다음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지금 저는 은총을 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은총을 주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주셨기에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 틀림없지만
은총을 느끼는 나를 중심으로 보면
제 탓으로 저는 은총을 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성탄을 앞두고 고백성사를 보면서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 하느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감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T.V를 보는 그 순간에도,
누구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잠자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못마땅해 하며 속으로 욕을 퍼붓는 그 순간에도,
심지어 욕정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에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런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은총은 주시지 않고 저와 함께 계시고
저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 사랑 없이 저를 감시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태양이 빛을 비추지 않고 내 위에 있을 수 없듯이
은총의 하느님도 은총을 베푸심 없이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방안의 난로가 꺼지지만 않았다면 있는 것만으로 온기를 전하듯
사랑의 하느님은 함께 계심이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함께 계심을 한 시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어찌 하느님의 은총은 느끼지 못하였던 건가요?
추운 데 있다가 들어오면 난로의 따듯함을 느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쐬면 빛을 느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넘치는 주의 은총, 한량없는 주의 사랑이 저로 하여금
은총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을 흘려버리게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불감증은 제 탓이 아니고
너무 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탓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는 난로 곁에 앉아서 난로 불을 쬐어야겠습니다.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있어봐야겠습니다.
너무 일이 바빠 온기만 누리고 난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불을 쫴야겠습니다.
관상은 그래서 일의 멈춤이고
부러 곁에 있음이고 부러 쳐다봄입니다.
그러니, 한 해의 마지막 날만이라도
하던 일 멈추고 은총을 좀 관상해 볼까요, 우리?
지난 한 해처럼 더욱 큰 은총으로 함께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그리고 그 고리 역할을 해 주신 당쇠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해에도 달려 갑시다.
껑충 껑충!!!
한 해동안 신부님의 말씀으로 아침을 열며
하루를 묵상가운데 시작할 수 있음이 제게는 가장 큰 은총이었습니다.
저희는 대가족이라 7남매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이기위해 신정을 쇱니다.
광안대교의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는 아름다운 바다를 내려다 보며
한 해동안 받은 은총을 헤아려봅니다.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강건하셔요.
주님께서 신부님에게 날마다 새 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는 말씀처럼
말(글)은 생명(영)을 지닌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는가 봅니다.
신부님과 함께 이 장을 통해 글로써 서로 소통함으로
하나되다면 우리의 만남이 바로 성사적 차원이 아닐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한 것처럼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도 없다 싶은데
신부님의 솔직한 자기고백은 고차원적인 영성 강의보다
심금을 울리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한 한해 였습니다.
그 동안 글을 통해 함께 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우리는 하나"라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 이해를 마감하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의 창고에서는 새로운 글이 나올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창고에는 늘 신선함이 가득하니,
그분을 힘입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멈추고,
부러 곁에 있고,
부러 쳐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은총 안에서, 은총을 느끼며 사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창고에는 퍼내도 퍼내도 아직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도 주님의 은총 충만하시길 기도드립니다. _()_............
한 해 동안 저의 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뒤인 내년에 다시 만납시다.
내년에도 제가 글을 계속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의 창고에서 새로운 글은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 새로운 글을 주실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