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나를 찾아
나는 나의 자유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이
나의 고유한 정체성을 이루는 묘목으로 자라나서 거룩한 열정의 나무로 성장하기까지
나 자신이 모르는 나에 대하여 깨닫게 되기를 꿈꿔왔다.
감정적으로 큰 걸림돌이 관계 안에서 생기면 의도하지 않아도
끔찍하리만큼 불안하고 우울하게 나를 몰아갔다.
그러한 감정의 홍수 상태는 기도할 때도, 일할 때도, 혼자 있어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나 자신을 좋게 생각하려는 욕구가 내가 모르는 내 속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려는 그러한 욕구는 끊임없이 나타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선택과 결단하는 회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피하고 싶은 이들과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시련을 평온하게 견디는 사람 안에서
당신이 머무실 자리와 쉬실 곳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우상을 경계하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의 힘으로 시작한 일을 인간의 힘으로 마치려는 것입니까?” (갈라 3,1.3)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무수한 은총과 자비롭게 돌보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외적인 형식과 겉치레로 보상하려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에 우리가 좋아하는 옷을 입혀
사로잡히게 하고, 노예로 만들며, 파멸을 초래하는 우상에 빠지게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만들었거나 사목자들이 만들었거나 전통과 외형적 틀을 강요하고
율법을 잘 지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탐내고, 의복, 역할, 호칭, 순종을 가장한 복종,
집단적 충성을 미덕으로 삼으면서 자신이 우상인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추락을 은총으로 여기기까지, 가난이 물줄기를 대줄 때까지, 겸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를 아는 지식, 곧 깨달음과 깨어남과 깨어있음의 은총을 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려는 매일매일의 결단만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고 그분께서 가신 길을 따를 수 있다.
가난의 실질적인 움직임들, 곧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삶만이
나에게서 나를 떠나보내도록 돕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정적인 것들을 통합하는 십자가의 쓰라린 죽음이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을 알아보는 장소가 바로 사랑으로 나를 내어주는 죽음의 장소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영의 활동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선을 선택할 때마다, 결단할 때마다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도 자유를 누린다.
나를 알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