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것을 너에게 내어주는 마음
외적인 자기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린 나의 자유를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맡긴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추락을 경험한 사람이다.
영적 죽음의 내적 위기를 겪어낸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내적 위기는 자신의 몸이 너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저마다 몸의 요구와 마음의 요구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몸의 요구를 다스리는 힘은 위로부터 받아야만 가능하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기쁨을 찾을 여유가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더 좋은 것만을 찾게 되고 더 큰 기대는 깊은 불만을 낳게 된다.
세상과 자기 내면에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도록 사는 것은, 수치의 체계를 넘어서는 일이며 수치심에 죽는 일이다.
영적인 삶은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사회적 존경, 안전, 이미지관리와 같은 낮은 차원의 욕구를 모두 내려놓게 한다.
우리는 단순함 작음,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의 목표가 세 가지 차원의 관계, 곧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사랑만이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버리고 ‘나’만 찾았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은 나를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요한 12,25)
영적인 삶은 내어주는 사랑에 목숨을 건 싸움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내어주는 삶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놓을 줄 모르는 사람,
재산과 건강과 명성 등 이것만은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삶을 잃어버린다.
집착은 우리를 사로잡히게 하고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놓아버리는 사람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맛볼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음보다 더 작음을 선택하는 기쁨은 단순하다.
좋은 것을 너에게 주고 덜 좋은 것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기쁘고 즐겁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더 좋은 것을 내어줄 줄 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순전히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말로
행복을 위한 가장 순수한 계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