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어제 믿음의 부자에 대해서 얘기한 야고보서는
오늘 죽은 믿음, 쓸모없는 믿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자 즉시 떠오른 것이
여호와 증인을 믿는 청년들의 양심적인 병역 거부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믿음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에 따른 불이익과 박해와 고통을 감수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믿음은 그들의 삶과 실천에 있어서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으며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옳은 믿음이냐 아니냐를 떠나서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옳다고 믿는데
그렇게 믿으면서도 그 믿음의 작동이 그들보다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보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그들보다 나은 믿음이고 옳은 믿음일지라도
고장 난 기계처럼 우리의 삶과 행위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옳은 믿음인지 몰라도 살아있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것을 요즘 신학의 실천적 무신론과 연결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믿기는 하는데
실천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실천적 무신론이지요.
다시 말해서 주일 성당에서는 믿는다고 하지만
성당을 나와 살면서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래서 하느님이 없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돈과 욕망을 쫓아 살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지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지 하느님이 안 계셔서 불행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복에 하느님이 전혀 상관이 없으면
하느님 계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죽은 믿음이란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믿음을 왜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까?
마음의 위안을 위해?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아니고 죽고 난 뒤를 위해?
그러므로 살아있는 믿음이란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거나
'믿는 사람이 우리와 다를 거 없네'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우리의 삶과 실천에 하느님이 살아있고,
그래서 믿음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지금 우리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소용이 없는 믿음?)
http://www.ofmkorea.org/320607
20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소용이 없는 믿음?
http://www.ofmkorea.org/320607
17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는, 우리는 어떤 탑을 쌓고 있을까?)
http://www.ofmkorea.org/99169
14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주어진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http://www.ofmkorea.org/60422
12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http://www.ofmkorea.org/5574
11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단절의 바벨탑을 허물라!)
http://www.ofmkorea.org/4878
09년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주님을 따르려면)
http://www.ofmkorea.org/2135
믿음 안에서 실천하는 삶~~~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