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티와 들보의 크기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티를 보면서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가끔 엉뚱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티를 보면서도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크기를 비교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기능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으며,
너무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감각기능이 한계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의 감각기능이 받아들이고 소화하는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장면을 볼 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세세히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누구는 이것을 보고,
누구는 저것을 봅니다.
같이 영화를 보고 나중에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가 보지 못한 장면을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익숙한 것,
내가 보려고 하는 것,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이 더 잘 보입니다.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것, 관심이 없는 것은
무심코 지나가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보고 싶지 않아도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힘들기에
억지로 힘을 써서 다시 감추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들보가 나타나는 빈도는 줄어들고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문제는 들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입니다.
나를 돌아볼 필요가 없기에
나를 돌아보는데 사용할 힘들을
남을 보는데 사용합니다.
나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문제 투성이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지 못하면,
나의 약함을 품어주시는 하느님도 보지 못합니다.
어려움의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 손을 뿌리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하는 조언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들보를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눈먼 사람이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