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이해
오늘 교회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종교적 신심을 전해준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오늘 들은 복음은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관한 이야기다.
하느님과 만나는 것 말고는 그것으로 나를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다.
나는 그 말씀을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메시지로 알아들었다.
● 기도
고독한 광야는 기도의 장소이며 현재다. 타인의 세상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자신의 세상으로 들어가서 광야라고 일컫는 고독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광야의 시간은 하느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며 자신과 자신이 만나는 시간이다.
자신의 광야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에 대한 앎이 객관적 이해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 안에서만 맴돌다 끝난다.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들었다.
회심은 ‘하느님’에 대한 앎과‘나’에 대한 앎으로부터 시작되어 피조물에까지 연결되는
생명과 창조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오늘날 이러한 광야는 외면당하고 무시되고 있다. 생업을 위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을 낭비하거나 소모적인 즐거움에 소비하고 만다.
특히 자신과의 만남을 회피하고 도망치기 위하여 대체를 찾는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의 그늘에 숨어 통제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시간을 보낸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를 반복하면서 밀린 숙제를 한다.
‘했다’만이 중요하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만남이 없는 기도와
기도의 양과 희생의 숫자만 세고 있다. 또한 그것으로 하느님과 흥정을 하기도 한다.
하느님과 너는 이용의 대상일 뿐 존중과 사랑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때로는 물리쳐야 할 원수가 되는 것이다.
나를 악하게 하고 자신을 증오하게 한 것은 나의 어리석음이고 어둠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선하심과 당신의 자비의 증거가 되도록
어둠을 통하여 빛을 거스르는 죄를 더욱 선명하게 보게 하신다는 말이다.
고독에 나아갈수록 존재의 선(善)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는 선한 행동과 말, 주님의 영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나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일하심, 모든 피조물 속에 담긴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겸허한 이해가 그분의 현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독 안에서 살 수 있겠는가?
● 단식
단식은 단순하게 금식하라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 발견된 ‘나’의 어둠과 죄를 관계의 회복을 위해 힘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가치체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나의 어둠에서 그분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 회심의 기반을 만든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저지른 단절의 어두움 속에서
나를 다시 만드시려는 그분의 선하신 활동에 맡겨진 시간이 고독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만드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 앞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면서 나를 알 수 있는가? ‘나’를 모르면서 ‘너’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의 근본이 ‘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재능과 돈을 사용한다.
통제를 위한 수단을 늘리기 위한 이익과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참혹하리만큼 처절하고
냉정한 관계를 만들고 자신의 통제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폭력을 저지르고 만다.
단식은 가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힘의 포기라고 일컫는 가난은 내려가는 것과 내려놓는 일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가로막는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모든 가치체계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내 자존심과 체면과 체통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힘을 내려놓고 꼭대기에서 내려오라는 말이다. 자아도취의 끝없는 반복이 만든 왕좌에서
내려와 겸손하게 너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라는 말이다.
● 자선
자선은 여백의 재물을 내어놓는 것보다 자비의 실체적 진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너의 구체적 필요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며
무엇보다 자선은 관계의 어려움을 견디고 용서를 위한 허용과
놓아주는 겸손으로 행동하는 자비다. 자선은 내어주는 몸과 쏟아내는 피의 현장이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 이것으로 모든 관계가 회복되며 새 창조의 관계를 이룬다.
조금만 주어도 그것을 부풀려 자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더 많이 행하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맛보고, 이전보다 더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행위와 경험의 질적인 과정에 달려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나와 피조물 안에서 선을 발견하고
단식을 통해 힘을 내려놓고
자선을 통해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나는 사순절의 시작과 함께 하느님과 나와 피조물과 더불어 내면의 여행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