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믿음과 죄인의 믿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32)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율법을 잘 지키고 기도의 양을 늘리고 희생과 제물을 많이 바쳐 도덕적 성취를 이루어
그러한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내세워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종교적 행위는 자신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한 관심사이며 예배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피조물과 너와의 관계는 이용의 대상으로 볼 때가 많다.
기도와 희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
무지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만심이 만든 무지가 결국 하느님의 자유를 왜곡해서
해석함으로써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전형적인 종교관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에 도취 되어 자신들보다 못한 이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누가 그러한 자격을 주었는가?
사람을 법과 죄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잣대와 저울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탓을 돌리고, 그들의 어깨에 멘 멍에를 무겁게 만들고,
삿대질과 욕설과 뒷담화로 타인의 선입견을 부추긴다.
율법은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뿐이지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막아서
관계의 단절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죄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에서 자신을 본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허다한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뿐더러 죄인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하느님과 너를 받아들일 공간과 여백을 마련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기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베드로 사도는 고기잡이를 통해 아찔하리만큼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경험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루가 4,8)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초점을 둔 사람들이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에
타인을 용서하고 자신도 내어주는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돌보심에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다.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흡족하게 해주는”
(이사야 58,10) 필요성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하고 위로부터 받았기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을 받았고 건강과 재능을 받았으며 제물과 함께 살아갈 이들을 선물로 받았다.
유혹과 악의 상태에 놓여 있는 나를 건져 주셨고 슬프고 고달픈 나의 처지를 알아주셨다.
우리는 받은 것을 내어주는 사람들이지 자기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사람들이다.
죄인의 상태에서 회심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복음의 예수께서는 나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분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세관에 있던 세리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라” (루가 5,27)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 (요한 21,19)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가9,23) 등등 따르라는 말씀은 여기저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다.”
측은한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의 관계를 살펴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가게 하는 일이 그분을 따르는 일이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믿음은 자신에게만 희망을 둔다.
자신으로 시작하여 자신 안에서 끝내려다가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파국에 직면한다.
인간의 근본이 흙이라는 사실을 잊고 영이 없는 육을 찾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죄인들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 안에서 마치려고
하느님의 손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드린다.
영이 육을 지배하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32)
자비의 도구요 육화의 도구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도구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도구이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없다.
영이 나를 지배하기에 내가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