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혁명을 불러오는 자유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답게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십시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2,12)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 25,34-3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안에서 긴급한 필요성을 발견했을 때 그 필요성을 채우라는 말이다. 그 필요성을 채우는 것이 곧 자유를 주는 법이다. 성프란치스코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이라고 강조하셨다.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주변의 관계들에서 발견된 그들의 필요성을 채울 때, 소리 내지 않고, 그때그때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 선의 흔적을 지우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이다.
“가장 작은 이”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들의 관계 속에 있으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만큼 내가 자유롭게 되는 특성이 있다.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는 너에게 자유를 주는 행동하는 자비의 현장에서 발견된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는 그 나라에서는 생명을 주는 기쁨으로 서로의 필요성을 채우기 때문이다.
선한 것들을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체험은 타인에게 자유를 주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도 깊어진다. 이러한 정체성 안에서 고통과 위험에 직면한 긴급한 요청들에 대해 용기 있게 투신해야 한다. 너와 나의 중심에 주님의 현존을 불러오게 하는 이러한 투신이야말로 우리를 원죄 이전의 상태로 이끌어 준다. 이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너의 필요성을 발견하고도 이를 외면하면 ‘죄’의 실재를 본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너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지옥이라고 일컫는 상태가 거기에 있으며, 거기에서는 단절의 고통과 외로움과 우울함만이 남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이 자리를 잡게 되면 인간은 끝없는 탐욕과 쾌락과 지배를 위한 대체를 찾으며 ‘흙’의 본성으로 돌아가 마침내 독점과 소유를 탐하다가 죽고 만다.
그것을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뿌리는 사랑하려는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에 있다. 부도덕한 죄인일지라도 우리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업적과 공로에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에 있다는 말이다. 은하계의 티끌인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경험하면 어떻게든 그 자비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너의 긴급한 필요성을 채우려는 것도, 받은 사랑에 대해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다.
참된 인간의 해방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있다. 아프고 괴롭고 슬픈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일상의 관계들, 견디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주는 관계들, 나누고, 협력하고, 돌보아주는 관계들 안에서 실현되는 자유에 달려있다.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곳, 자격이 없어도 돌보시는 아버지의 현존을 너와 나 사이에서 발견하는 신비가 거기에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게 하는 관계의 혁명이 시작되는 곳, 거기에서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야말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은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원복으로 돌아가는 회심의 기준이며 해방의 기준이다.
자유는 창조하는 능력이다. 자유롭지 못하면 인간의 창의력은 힘을 잃고 만다.
나에게서 내가 해방된 이들만이 자유를 즐길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즐기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길 것인가?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과 공통되는 무엇인가를 찾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계속해서 피조물의 본성에 숨을 불어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하느님의 숨이며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선물로 받은 이 자유는 공동으로 가꾸어야 할 우리의 보물이며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