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니에서 배우는 사랑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던 밤
세상은 고요 속에 잠들고 눈떠계시는 분은 인간적 고뇌를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 깨어있어라.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4-36)
나는 지난날의 숱한 허물을 겟세마니의 예수님 앞에 내놓고 싶었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내 힘으로 나만의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자만심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며, 나는 약하고 마음이 산만하며 눈이 멀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 했으며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은 관계의 현장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그분 없이는 너무나 꼴사납고 무력하므로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밑바닥에서 일하시는 그분은 온전히 선물로 주어지게 될 미래를 앞당겨 놓으셨다. 지금의 내가 되어야 할 나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되어야 할 나는 육화의 도구로써 조금이나마 그분을 닮아가려는 나의 모습에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나의 밑바닥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그분께 내어드렸기 때문에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희생과 기도, 업적과 공로와 상관없이 당신의 자유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시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내가 깨어있을 때는 언제였던가!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을 줄 때만 깨어있었고 그밖에는 잠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인식과 의도의 렌즈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깨달음과 깨어남과 깨어있기란 불가능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를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에서 보기 전까지는 사물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그것들이 목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사물들 속에서 하느님이 빛을 발하시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물질과 영, 인간성과 신성의 일치를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며, 만물이 더욱 풍성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죽고 부활하는 순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십자가에 매달려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십자가의 신비를 잃어버렸다. 십자가를 죄의 대가로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신비로 인식할 때 희망이 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십자가로 인식한다는 것은,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화가 나신 하느님을 달래기 위해 희생을 동원하고 값을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로 전락해버린 나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 떨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에페1,4) 그분은 역사가 은총으로부터 타락한 것이라는 부정적 개념을 넘어서 하느님 앞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의 길로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나는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구체적 실체로 드러난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할 때마다 삼위일체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물을 하나로 화해시킨(골로 1,17-20) 분께서는 인간에 대한 냉혹한 심판관이 아니시고 인간의 부족함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사랑은 통합적인 인식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삼위일체에서 예수님만 빼내어 예배한다면 아버지와 성령의 깊은 사랑에 대한 이해와 인식 없이 화가 난 군주와 엄한 심판관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도록 할 때가 많다. 삼위일체는 모든 관계성의 원천이며 거기서 우리는 통합을 배운다. 하느님과 나와 피조물의 관계가 거기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겟세마니에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신비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현존을 드러내 준다.
죽음을 거처 부활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결코 죄의 대가라기보다 아버지의 자비와 선이 성령 안에서 사랑의 신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에 죽는 삶은 관계 안에서 내가 죽는 죽음이며 그 죽음은 부활하는 생명으로 너와 나를 살린다. 우리는 저마다 관계 안에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라는 죽음을 경험한다. 내려가고 내려놓는 가난은 죽음이며 겸손하게 너를 허용하고 놓아주는 자유는 내가 괴로워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을 때 나를 살린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보속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보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인가?
나만 챙기겠다는 무서운 집념과 자만심이 탐욕을 불러와 독점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져 관계를 망치는 현장에서 사랑하기 위해 죽는 죽음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사랑으로 지는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사랑은 너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내어주는 몸이지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할 수 없이 내놓는 몸값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내어주셨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확신이 몸값을 지불하는 이유다. 용서가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사랑하기 쉽도록 나를 내어주고 또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스스로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사랑을 위해 쓰여질 때만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현장에 있다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가 선을 행할 대상이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또한 내가 그렇게 괴로울 때 누군가가 내 소리를 듣고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