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와 황소의 피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피와 관련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정화의 피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때 얘깁니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고민이 크고
저 자신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꽉 차 있을 때였는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무를 꺾어 그것을 짚으며 내려오는데
마침 완전히 술에 취한 군인이 마주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린 저희에게 시비를 걸다가
제 친구의 몽둥이를 뺏어 제 친구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먼저 그 군인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시뻘건 피가 막 흘러내리는데 놀라거나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뭔가 제 안에 있던 나쁜 것들이 싹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평온이 제 안에 깃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의 피가 내 안의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평온케 하였을까?
그의 흐르는 피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피를 식히고
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피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입니다.
피가 있으면 살고 피가 빠지면 죽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니 피를 본다는 것은 삶의 다른 모든 주제들을 잠재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불평불만이 불 뱀에 의해 쏙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 기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은 그 불편한 상황과 거친 음식 등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최고조에 달하자
불평을 한꺼번에 쏟아놓았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 불평을 한 사람을 물어 죽게 하자
불평은 싹 사라지고 살려만 달라고 합니다.
죽게 되자 삶이 보이고
그렇게 큰 문제였던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위한 처방이 바로 자기들을 죽게 한 그 불 뱀을 보는 것,
그것도 불 뱀을 높이 매달아 놓고 모두 올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우러러봐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욕정을 잠재우고
피는 모든 욕구들을 정화한다.
그렇게 피는 죽음으로 살린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죽어야 죽은 뒤에 산다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참사랑의 피는 우리의 피를 대신하여
우리의 욕구들을 정화하고
욕정에 죽게 함으로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을 섬기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피와 관련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정화의 피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때 얘깁니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고민이 크고
저 자신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꽉 차 있을 때였는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무를 꺾어 그것을 짚으며 내려오는데
마침 완전히 술에 취한 군인이 마주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린 저희에게 시비를 걸다가
제 친구의 몽둥이를 뺏어 제 친구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먼저 그 군인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시뻘건 피가 막 흘러내리는데 놀라거나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뭔가 제 안에 있던 나쁜 것들이 싹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평온이 제 안에 깃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의 피가 내 안의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평온케 하였을까?
그의 흐르는 피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피를 식히고
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피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입니다.
피가 있으면 살고 피가 빠지면 죽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니 피를 본다는 것은 삶의 다른 모든 주제들을 잠재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불평불만이 불 뱀에 의해 쏙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 기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은 그 불편한 상황과 거친 음식 등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최고조에 달하자
불평을 한꺼번에 쏟아놓았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 불평을 한 사람을 물어 죽게 하자
불평은 싹 사라지고 살려만 달라고 합니다.
죽게 되자 삶이 보이고
그렇게 큰 문제였던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위한 처방이 바로 자기들을 죽게 한 그 불 뱀을 보는 것,
그것도 불 뱀을 높이 매달아 놓고 모두 올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우러러봐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욕정을 잠재우고
피는 모든 욕구들을 정화한다.
그렇게 피는 죽음으로 살린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죽어야 죽은 뒤에 산다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참사랑의 피는 우리의 피를 대신하여
우리의 욕구들을 정화하고
욕정에 죽게 함으로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을 섬기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나의 남은 삶을 정화 시켜 아름답게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 많은 방법 중에 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셨는가를 알아듣습니다.
죽음 앞에서만이 뿌리 깊은 이기심이 고개를
숙이는 존재가 바로 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살아 있으면서 죽을 수 있는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 보는 이 순간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