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과 관계성 안에서 발견되는 새 하늘과 새 땅”
삼위일체 신비는 관계적 모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요한 3,34-35)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는 아버지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드렸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영과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완전한 신뢰 속에서 자신을 내어놓고, 내어주고, 내어 맡기면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는 내어준 흔적도 보상에 대한 기억도 없는 사랑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계시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모델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의 관계가 참여하는 선과 공유하는 선으로써 관계를 넓히도록 초대받고 있다.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는 전체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 안에서 나를 볼 수 있어야 진리다. 나를 포함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의 정체성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자유는 내가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언제나 지금이며, 여기 내가 있는 곳에서 구체적 현실로 경험한다. 우리의 믿음이 정착할 땅,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기쁨의 열매를 맺기까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에 물줄기를 대 주는 것이다. 자유롭게 내어주는 기쁨은 계속해서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에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도록 돕는다. 사랑에 따르는 고난이 하느님의 창조를 관계 속에 가져오게 한다는 말이다. 허용하고 놓아주는 에너지가 자유로 태어나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너와 피조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범과 발자취를 매우 가까이에서 따르려는 과정에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가 아니고 현재로 경험한다. 이러한 사실이 구체적 믿음으로 드러나게 되면 차후 보상과 형벌의 교리는 힘을 잃고 만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며, 세상 만물은 매우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내어주면서 죽고 죽으면서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울에 반사된 너와 나의 관계는 피조물에 반영된 하느님의 선하심을 통해 조명을 받을 때만 도취 된 우월감 속에서 전체를 지배하려던 나를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충격이 없다면 꼭대기에서의 추락은 불가능하다. 변화는 언제나 추락 후에 온다. 추락이 변화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요한 10,18)
할 수 없이,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내어놓는 목숨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는 몸이며 스스로 쏟는 피이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릴 피” 용서를 위해 흘리는 피이며 자유를 주어 살리기 위하여 쏟는 피다. 생명을 주는 용서와 사랑의 구체적 진실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안에서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인간의 죄다. 거기서부터 단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카인의 죄로부터 인류가 반복하여 저지르는 죄가 거기에 있다. 죗값을 치러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사랑으로 죽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는 언제나 죽음을 동반하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으로 태어나는 창조가 있다. 내어주는 몸과 흘리는 피가 성사로써 일상의 관계를 비춘다. 이 성사는 영성체를 통해 참여하는 것이라기보다 내어주고 쏟는 피의 실재를 관계 속에서 드러냄으로써 성사에 참여한다. 받아들임과 용서가 구체적 진실이며 선을 행함으로 하느님을 드러내 주는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로 다시 돌아가는 순환 안에서 얻는 자유와 행복이며 참여로써 얻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막을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선을 어둡게 하는 환상에 빠진 자들이 무지의 어둠에서 방황할 뿐이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요한 묵시록 21,1-4) “새 하늘과 새 땅”은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 사이에서 단절로 멀어졌던 사람들이 관계를 회복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며, 사랑으로 죽는 사람이 경험하는 실재가 되었다. 미래에 있을 처벌과 보상이 아니라 현재에서 경험하는 처벌과 보상이 되었다. 선은 자체로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벌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둔한 생각일것입니다.저는 믿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