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 만찬 미사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의 첫 번째 뜻은
당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묵상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며 사랑의 동력이 점점 떨어져
그저 자기 사는 것에 급급한 우리 보통 인간을 생각할 때 그리고
저를 성찰할 때 '내 생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사랑은 없고 고통과 고독만 있을까 봐 걱정이 됐습니다.
그렇지요. 고통만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고,
고독만 있다는 것은 주님도 없고 이웃도 없다는 것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였다는 것의 진짜 뜻은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 뿐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이며,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칠 것을 아셨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다 도망간 뒤 홀로 십자가에 계실 때도 사랑하셨다는 뜻일 겁니다.
배반.
이것은 당신 사랑을 거부한 것인데 그런데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겁니다.
제자들의 배반은 당신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으신 것인데 이것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실패한 게 아니라 사랑을 포기할 때 실패한 것이고,
아무리 내 사랑이 거부돼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랑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랑만 사랑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실패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한 것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당신 살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발 씻음은 더러운 발인 죄를 씻음입니다.
제자들의 죄는 배반의 죄요 주님을 버리고 떠난 죄인데
제자들은 그 발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그 발을 씻어주심은 도망쳤을지라도
다시 그 발로 돌아오라는 초대요 관계 회복의 용서입니다.
나를 버리고 도망간 그 더러운 발로는 내게 다시 돌아올 생각 말라고 하지 않고
탕자의 비유의 그 아버지처럼 집 떠나 떠도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며
오히려 그 발을 뜨거운 물로 찜질해주시고 씻어주시는 용서의 퍼포먼스입니다.
인간의 그 수많은 연극이나 행위 중에 이보다 더 감동적인 퍼포먼스는 없습니다.
무릇 모든 감동은 사랑이 없으면 감동도 없고,
사랑 중에서도 배반을 넘어서는 사랑보다 감동적인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 씻음으로 관계를 회복시키신 주님께서는
이제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새옷을 입히고 양을 잡아 잔치를 베푼 아비처럼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식탁을 차린 뒤 그것을 나눠주십니다.
그런데 죄인인 자기를 받아들이고 식탁을 차려주는 것만도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는데 그 빵과 포도주가 바로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며
앞으로 이 빵과 포도주를 같이 나눠먹되 먹을 때마다 당신 사랑을
기억하라 하시니 눈물이 앞을 가려 먹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발을 씻어주시면서도 서로 그렇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과제를 남겨주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인 우리에게 또다른 과제를 남겨주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이 성찬례를 같이 거행해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과제인데
비유의 큰 아들처럼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닮지도 못한
우리라면 이 성찬례를 결코 같이 거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혼밥과 혼술 시대에 주님의 만찬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입니다.
이 도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피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 강론은 쉬겠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성삼일 거룩하게 보내시고
기쁘고 즐거운 부활 맞이하시기 바라고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