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늘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 성탄이건 부활이건
2천여 년 전 베틀레헴과 예루살렘의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발생해야 그것이
참으로 내게 의미있는 성탄이고 부활이라는 겁니다.
물론 2천 년 전 베틀레헴의 그 첫 성탄이 없었다면
유다인의 하느님을 대한민국의 내가 믿을 이유가 없어서 믿지 않을 터이니
2천여 년 전에 주님 탄생은 너무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며 부활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루살렘의 그 첫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근본적으로 헛된 것이 되니 역사적인 부활이 무엇보다 의미 있지요.
그런데도 주님의 성탄과 부활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발생해야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의 명약이 2천 년 전에 발명이 됐어도
먹어야 그 약효가 내 안에서 효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약이 발명되지 않아도 문제지만
약을 먹지 않아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뭣 때문일까요?
그것을 저는 어제 새벽에 묵상하다가 깨닫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서
부활하시지 못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주님이 제 안에서
죽으신 적이 없기에 다시 살아나시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이란 말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니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다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 안에서 돌아가신 적이 있어야 다시 사시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 아니 계신 적이 없고 늘 함께 계시는 분이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문제는 제 안에 늘 계시는 그분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어 제 안에 안 계셨다면 저도 어떤 식으로든 주님을 살려냈을 텐데
비록 가죽음 상태로라도 계시기에 그것만 믿고 문제의식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성삼일 제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온 것이고,
그래서 한편 부끄러웠지만 다른 한편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에 제가 체험한 주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은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확실히 죽이고
참생명의 주님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야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죽여야 할까요? 방법이 뭘까요?
이제와서 니체처럼 신은 내게서 죽었다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될까요?
그것은 안 될 일이고, 억지춘향입니다.
내 안에 엄연히 계신 주님을 사형 선고 내린다고
그 주님이 죽지 않음은 물론 그러고는 제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어떡해야 합니까?
어떻게 주님을 죽이고 어떻게 살려내야 합니까?
잘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제 안에서 가죽음 상태로 계신 이유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되겠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에 나도 사는 저이어야 하는데
내가 살아서 주님이 기죽어 계시는 상태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야 죽어 계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그런데 나를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내가 죽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것이 한두 번 아니고 노력 안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먹되 주님께서 죽여주실 때 그 죽음을 거부하지 않음이 하나요.
죽여주실 때 그것을 잘 알아채고 순순히 죽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죽어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죽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관을 스스로 따지 못하여 따주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스스로 죽지 못하기에 안락사를 돕는 다른 이가 필요하듯
죽여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죽여주시고
그때 우리는 죽여주시는 주님의 그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주님이 제 안에서 살아나는 부활 체험은
일생일대의 큰 체험이고 이런 부활을 우리는 큰 부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부활 체험을 하고
그래서 저처럼 주님께서 내 안에 늘 계시지만
가죽음 상태로 계신다면 작은 부활도 있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일상의 부활이요 그때그때의 부활 말입니다.
살다 보면 깜빡깜빡 주님을 까먹어
주님께서 죽어 계시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수녀원에 오면서 부활 선물로 돼지고기와 저희가 키운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잊지 않으려고 며칠 전부터 신경 썼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돼지고기만 가지고 오고 콩나물은 안 가져 왔으며,
한심하게도 수도자가 정작 수도복을 안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광야 체험을 하고 돌아오면서 수도복과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또 와서 보니 콩나물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처럼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도 그보다 하찮은 것에 신경 쓰다가 까먹는 것이
인간이고 특히 저인데 하느님도 종종 이렇게 하찮은 것들 때문에 까먹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까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기도하는 대신 걱정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갈망하는 대신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일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렇게 까먹은 주님을 다시 살려내는
일상의 부활이요 작은 부활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번 부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