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사랑을 통과하면 현존을 느낀다.
막달라 마리아의 고독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변화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의 고독이 사랑을 통과하면 부활하신 분의 현존을 관계 속에서 느낀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신적 생명이 인간적 생명으로 들어왔다가 인간적 생명이 신적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의 고독은 분출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통과해야만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 신적 생명이 인간적 생명 안에서 육화되는 신비가 없다면 사랑의 에너지를 육체적인 성생활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육화할 수 없다. 고독이 사랑을 통과하지 않으면 암적인 고독이 된다. 하느님 없는 나, 너 없는 나, 피조물이 없는 나는 그리스도 없는 예수님만을 찾다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의 활동은 우리의 나약한 인간성 안에서 현존으로 접촉하도록 이끄신다. 고독의 내적 정원에서 현존을 발견함으로써 관계의 질을 개선하고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만 찾다가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다.”(요한 1,30) 우리의 관계 속에 계신 분을 알아보는 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옳고 그름에 문제가 아니다. 연결만이 중요하다. 일시적인 연결이 아니라 항상 연결된 상태에 머무는 것만이 중요하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결된 상태에 있어야 현존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서로 갈라져 싸우는 지구상의 인간들은 과도한 탐욕과 이기주의가 불러온 참상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 우리 가운데 서시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신다. “마리아야” 그분의 음성은 시끄러운 내 소리를 멈출 때 들을 수 있다. 현세의 삶과 세상, 그리고 내 안에 부활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임무는 분출되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접속함으로써 다시 연결되어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이 사랑을 통과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