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반복되는 얘기는 우리 인간이 죽인 주님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뿐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주님은 살리시는 분인 데 비해 인간은 죽이는 존재입니다.
주님도 죽이니 인간도 죽이고 모든 피조물을 다 파괴하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하면 지나친 얘기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고,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도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법자란 어떤 존재입니까?
율법이 없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이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무법이란 하느님의 법이 없고 사랑의 법이 없는 겁니다.
물론 그들도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고 얘기하고 원래는 그랬지만
율법만 있고 사랑의 법이 없었기에 무법자가 되고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실로 사랑만이 생명을 보고, 생명을 보기에 생명을 살립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생명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소유하거나 이용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사랑은 없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그러하고
사랑이 없이 욕심만 있는 사람도 그러긴 마찬가지입니다.
지지난 주 벚꽃이 한창 필 때 안양천을 자전거로 출근하다가
벚꽃이 참으로 아름다워 '참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에 취해 아름다움 관상을 하며 더 가는데
문득 꽃이 아름답기로서니 사랑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하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노래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그러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꽃보다 아름다운 겁니다.
사랑할 때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게 보고, 생명으로 보고 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꽃을 꺾듯이 사람도 꺾겠지요.
어찌 어린애를 굶겨 죽일 수 있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찌 어린 소녀를 한갓 성적 욕망 때문에 꺾을 수 있습니까?
사랑은 없고 욕망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찌 인신매매와 장기매매가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로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 생명이 보이지 않고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생명이 보이고 존재가 보입니다.
사랑의 눈이 없으면 아무리 봄이 오고 싹들이 땅을 뚫고 나와도 볼 수 없고
그것들의 신비로움을 경외의 눈과 신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모든 생명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시들시들한지 싱싱한지가 보이며
시드시들하면 마음이 아파 물과 거름을 주고
싱싱하면 생명의 찬가를 주님께 읊을 겁니다.
그러니 봄철에 부활절까지 맞이한 우리는 사랑과 생명의 찬가를
생명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주님께 읊어야겠습니다. 사랑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