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의 신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춘다.
그리스도 없는 예수, 예수 없는 그리스도
물질 없는 하느님의 영, 영이 없는 물질
십자가 없는 예수, 예수 없는 십자가
죽음 없는 부활, 부활 없는 죽음
영혼 없는 몸, 몸이 없는 영혼
영성 없는 실천, 실천 없는 영성
육화의 신비는 통합과 연결의 신비, 두 가지가 다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개종하기 전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가 개종한 후 처음으로 다마스커스에서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설교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사도 9,22) 사울이 회심을 통해 체험했던 깨달음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셨다는 것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내용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의 질문에 사도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 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이라고 부르던지, 그리스도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리스도 없는 예수와 예수 없는 그리스도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 모두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의 인간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구분해서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믿음의 핵심에는 인성과 신성이 결합인 육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보편적 신앙이 정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연합이다. 영혼 없는 육신은 죽은 사람이며 육신 없는 영혼은 유령이다. 인간의 몸에서 하느님의 숨을 빼면 흙으로 남는다. 창조는 흙으로 빚은 인간의 몸에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은 결과였다. (창세 2,7)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8,9)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로마 8,11)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8,21)
나는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원형이며 최초의 원인과 모델로 이해하도록 배우지 못했으며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골로 1,15)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골로 1,17-18)
나에게는 물질과 영이 분리된 채로 기억되었으며 인성과 신성 또한 예수님 안에서 육화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나의 믿음과 삶을 통해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물질과 영,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은 요한복음과 바오로의 서간을 통해서 처음부터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육화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통합과 연결의 신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중심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분출되는 선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내 믿음은 그로부터 물줄기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은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님만을 뽑아내면 하느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그리스도 없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가둠으로써 중심도 없고 방향도 없으며 숨만 쉬는 생명만을 유지하려 애쓸 뿐, 목적도 없는 미아가 되고 만다.
육화는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잉태하는 모태는 나의 몸이다. 잉태된 말씀이 사랑으로 태어나 심각하게 손상된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의 관계를 회복하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분출되는 사랑에 응답하려고 용서하는 선, 받아들이는 선, 놓아주고 허용하는 선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때문이다. 육화는 기쁨의 샘이 되었다. 영원한 지금과 충만한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함께 계심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태어나 느낌으로 서로를 비추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육화로 드러내는 신비, 이것이 육화의 도구로서의 나의 성소다.
말씀을 잉태하여 사랑을 낳는 관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빵을 쪼개는 표징이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써 관계 안에서 실천될 때, 육화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