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꽃이 핀 곳에 부활이 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삶은 유혹에 빠진 삶이다.
인간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이 우상이 될 때 관계 속에 계신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것이지
내가 변해야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제까지 우리는 받아들임보다 금 밖으로 밀어내는 데 치중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닐 때 벌어지는 일이다.
예수님을 단지 죄라는 문제의 해결사로 보게 되면
죄 자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면 웃을 수 없다.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부활하신 분께서 나와 함께 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활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다.
부활한 사람만이 웃을 줄 안다.
기쁨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사람만큼 하늘 아래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영광은 생생한 인간의 웃음을 통해 더욱 영광스럽게 된다.
부활이 기쁨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직 무덤에 있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기쁨으로
해맑게 웃는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함께 웃고 계실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