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노아의 대홍수 얘기를 생각하면
하느님은 정말 인류를 파멸시키셔야 했을까,
그리고 꼭 대홍수와 같은 방법으로 파멸을 내리셔야 했을까?
개혁과 혁명.
세상을 바꾸는 두 가지 방법입니다.
그런데 혁명이면 몰라도
개혁으로 세상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개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지요.
개혁과 혁명,
그렇다면 무엇이 차이점이기에 혁명은 성공하고 개혁은 실패합니까?
개혁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두고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고
혁명은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지요.
개혁은 기존의 그 사람과 그 제도를 긍정하면서도 바꾸려는 것이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혁명은 그 사람과 그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세상이 바뀔 수 없다는 부정, 불신, 절망의 선택인 것입니다.
노아의 대홍수는 혁명과 같이
지금의 인간은 너무도 타락하여 도저히 바뀔 수 없으니
다 없애버려야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불신, 절망이 배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인간에 대해서 불신하고 절망하셔서,
그리고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셔서 대홍수를 내리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되실 줄 몰라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고,
당신 뜻과 다른 결과에 당황하시고 후회하시는 것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답지 않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그럴 줄 모르셨다니 맞지 않고,
인간의 배반과 거역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만드신 것을 후회하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자유의지를 주실 정도로 사랑하였습니다.
인간의 배반과 거역과 싫다 함을 두려워하셨으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작아 자신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면
그 사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배반하고 거역할 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로 당신을 사랑하라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은 우러나오는 것이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와 자유의지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인간의 배신과 거역에 뒤통수 맞고
화가 나고, 실망을 하고, 후회를 하며 대홍수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대홍수는 하느님께서 작심하고 마음으로 내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리로 내리신 것입니다.
노자가 天地不仁을 얘기할 때
順理를 거슬러가면서까지 仁하지 않다는 뜻이 있듯이
眞理를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이 어째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무자비한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할 때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하느님이 작심하고 건강 나빠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듯
대홍수도 지금의 구제역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眞理를
順理이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 함을
오늘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묵상합니다.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노아의 대홍수 얘기를 생각하면
하느님은 정말 인류를 파멸시키셔야 했을까,
그리고 꼭 대홍수와 같은 방법으로 파멸을 내리셔야 했을까?
개혁과 혁명.
세상을 바꾸는 두 가지 방법입니다.
그런데 혁명이면 몰라도
개혁으로 세상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개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지요.
개혁과 혁명,
그렇다면 무엇이 차이점이기에 혁명은 성공하고 개혁은 실패합니까?
개혁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두고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고
혁명은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지요.
개혁은 기존의 그 사람과 그 제도를 긍정하면서도 바꾸려는 것이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혁명은 그 사람과 그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세상이 바뀔 수 없다는 부정, 불신, 절망의 선택인 것입니다.
노아의 대홍수는 혁명과 같이
지금의 인간은 너무도 타락하여 도저히 바뀔 수 없으니
다 없애버려야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불신, 절망이 배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인간에 대해서 불신하고 절망하셔서,
그리고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셔서 대홍수를 내리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되실 줄 몰라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고,
당신 뜻과 다른 결과에 당황하시고 후회하시는 것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답지 않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그럴 줄 모르셨다니 맞지 않고,
인간의 배반과 거역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만드신 것을 후회하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자유의지를 주실 정도로 사랑하였습니다.
인간의 배반과 거역과 싫다 함을 두려워하셨으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작아 자신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면
그 사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배반하고 거역할 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로 당신을 사랑하라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은 우러나오는 것이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와 자유의지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인간의 배신과 거역에 뒤통수 맞고
화가 나고, 실망을 하고, 후회를 하며 대홍수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대홍수는 하느님께서 작심하고 마음으로 내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리로 내리신 것입니다.
노자가 天地不仁을 얘기할 때
順理를 거슬러가면서까지 仁하지 않다는 뜻이 있듯이
眞理를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이 어째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무자비한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할 때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하느님이 작심하고 건강 나빠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듯
대홍수도 지금의 구제역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眞理를
順理이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 함을
오늘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묵상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한다...자유의지로 사랑해야한다!
이게 무슨 자유의지인가요?
사랑을 하든, 거부를 하든, 배반을 하든 심지어 죽이든 ...
이것이 자유의지 아닌가요?
자연의 순리 대로 흘러 갑니다.
남는가는 요사이 구제역으로 뼈아픈 현실로
닦아왔다 하느님의 진리,순리를 묵상해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운명 결정권을 쥐고 계신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운명의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자업자득이다 생각하니 ...................!!!
더 이상 할말을 잊습니다.
그 문제의 한가운데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