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아시다시피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로 사도가 된 분이기에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뽑은 것이라는 복음을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의 복음으로 교회 전례는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뽑으신 거라는 말씀은 마티아 사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뽑힌 것이 로또에 당첨되듯이 행운입니까?
아니면 지독한 불운이고 재수가 없어서 뽑힌 것입니까?
어렸을 때 저에게는 소중한 체험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어 돈도 없고 키도 작고 힘도 없는 저를 인정해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한테만 잘해 주신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선생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 선생님은 저에게 일을 자주 시키셨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쌀 때 '찬선이 남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남으면 그날 시험 본 것의 채점을 저에게 맡기시곤 하셨는데
그것을 하다 보면 동무들과 놀 수 없는데도 저는 그것이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웠습니다.
저를 부려먹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빼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평의원 선출을 하면 대부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직책과 책임을 맡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그 일의 적합자로 인정하시고
무엇보다 사랑하신 거라고 생각하기보다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만 부르시고 뽑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은 종이요 일꾼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이렇게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살라고 하시는데
사랑의 기쁨과 행복의 성소를 살지 못하고 일꾼의 성소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않기에 불행하고 죽으라 일만 하기 때문에 지칩니다.
수도자들을 보면 사랑의 성소에 실패하여 얼굴에 그늘이 있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자녀의 사랑이라도 있어서 작은 행복이 있는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 실패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도 실패한 수도자들은
기쁨과 행복을 사랑 안에서 찾지 못하고 일의 보람에서 찾으려다가 그리된 겁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의 보람을 얻기 위해 일을 했는데 보람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성소에 실패할 경우 초기에는 의미를 찾지 못해 실패하는 데 비해
나이를 먹어서 수도원을 떠나는 것은 의미를 잃기 때문인데 왜 의미를 잃겠습니까?
사랑을 잃으면 의미를 잃는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어쩌면 이런 '의미 상실의 실패'를 한 것이 아닐까요?
그에 비해 그의 자리를 이은 마티아 사도는 길이 남을 열매를 맺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의 축일을 지내며 사랑의 성소를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