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새로운 시작.
이 말은 좋은 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선 “새로운”이라는 말이 좋고 아름답습니다.
간혹 새로운 것이 싫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옛 것보다 나쁜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옛 것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거기에 안주하거나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더 그렇게 되지요.
성당에 가서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야지 마음이 편안하고,
그 자리에 다른 누가 앉아 있으면 괜히 침범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면
바로 그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려면 불안해야 합니다.
不安이란 平安하지도 않고 便安하지도 않은 것이기에 나쁜 것 같지만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란 쉽게 平安과 便安에 安住하기에
不安해야 安住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것처럼 불안은 심지어 필요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를 하려면,
또는 묵시록이 얘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려면
안주하지 않는 복음적인 불안정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정과 불안을 싫어하지요.
그래서 스스로는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곳을 떠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결국 옛것의 파국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면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인간의 산과 하느님의 산 사이의 심연을 거쳐야 하듯,
파국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이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파국을 맞았을 때 새로운 시작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지혜와 용기를 우리는 독수리에게서 배웁니다.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노아는 601살이 되는 해 첫째 달 초 하루에
새 땅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600년을 살고 인생이 파국을 맞았지만
601살에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파국은
새로운 350년의 삶을 위한 파국이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이 파국을 맞아야 하고
어떤 것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까?!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새로운 시작.
이 말은 좋은 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선 “새로운”이라는 말이 좋고 아름답습니다.
간혹 새로운 것이 싫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옛 것보다 나쁜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옛 것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거기에 안주하거나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더 그렇게 되지요.
성당에 가서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야지 마음이 편안하고,
그 자리에 다른 누가 앉아 있으면 괜히 침범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면
바로 그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려면 불안해야 합니다.
不安이란 平安하지도 않고 便安하지도 않은 것이기에 나쁜 것 같지만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란 쉽게 平安과 便安에 安住하기에
不安해야 安住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것처럼 불안은 심지어 필요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를 하려면,
또는 묵시록이 얘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려면
안주하지 않는 복음적인 불안정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정과 불안을 싫어하지요.
그래서 스스로는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곳을 떠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결국 옛것의 파국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면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인간의 산과 하느님의 산 사이의 심연을 거쳐야 하듯,
파국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이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파국을 맞았을 때 새로운 시작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지혜와 용기를 우리는 독수리에게서 배웁니다.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노아는 601살이 되는 해 첫째 달 초 하루에
새 땅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600년을 살고 인생이 파국을 맞았지만
601살에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파국은
새로운 350년의 삶을 위한 파국이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이 파국을 맞아야 하고
어떤 것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까?!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겠습니다.
가장 손쉬운 것은 나부터
불편하고 부족하지만,
더 이상의 고급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싶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처럼
제 속마음은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