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평화의 반대는 불안과 불화이고
그래서 평화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말 미사에서는 평화 대신 평안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는 평화라고 하는데 그들은 화평이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아무튼, 평화에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화평은 관계적 차원입니다.
관계가 좋지 않고 갈등 관계이거나 싸움이나 전쟁 상태일 때
우리는 화평을 청하기도 하고 그래서 화해가 이뤄졌을 때 평화롭다고 하는데
이처럼 평화의 중요한 한 축은 관계의 화해가 이뤄진 상태로서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평화는 평화의 다른 한 축인 평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도 겁내지도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이 얘기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니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예견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곧 당신이 돌아가시고
당신을 죽게 한 사람들이 제자들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심란해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습니까?
이런 경우 최악을 각오하면 곧 죽기를 각오하면
그런 상황이 와도 담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평화는 담담함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최악을 각오하는 것은 최고의 가난이기에 그러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순간 모든 것이 선이 되는 건 사실이기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각오하고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왔을 때 너 이제 왔냐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마음의 각오로 인한 평화가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평화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마음의 각오는 나 혼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이런 평화는 마음 수양을 통해 내가 이루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평화이고
그것은 주님께서 갔다가 다시 오심을 믿을 때 생기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평화를 준다고 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평화는 든든함의 평화요 믿음의 평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무엇보다도 든든하고 무서울 것이 없을 터이니
주님의 오심을 믿고 심란해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인간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께서 함께 계시니 무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